1. 본문: 시 1:5-6절
2. 명제: 우리 앞에는 심판과 구원이라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선언적 명제
3. 제목: 우리 앞에 놓인 두가지 길
1. 갈등: 두가지 길
오늘 말씀은 시편 1편의 마지막 두 절입니다. 이 대목은 결론이자 어떤 의미에서는 절정이기도 합니다. 시편 1편에서 시편 기자는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알려 줍니다. 그리고 그가 채택한 방법은 비교와 대조입니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경건한 사람과 불경건한 사람, 믿는자와 불신자, 경건한 삶과 악한 삶 즉 불경건한 삶,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겨와 같은 삶이 비교됩니다. 그의 논점은 참된 행복을 누리려면 경건해지는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행복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에 달려 있고, 그 결과로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전체적인 시각을 제시합니다. 그는 5절에서'그러므로'라고 말하고 앞선 내용의 궁극적인 논리적 결론을 내놓습니다. 그는 참된 행복이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도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해 왔습니다. 이행복은 즉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것들에 의존하지 않고, 단 한 가지에만 달려 있습니다. 이 행복은 지속되는 것이고, 우리가 만일의 사태와 우발적 사건에 맞설 수 있도록 힘을 줍니다. 그리고 이제 시인은 좀 더 나아갑니다. 그는 이 행복이 영원히 계속된다고 말합니다. 이 행복은 이 세상에서 멈추지 않고 내세까지 이어집니다. 그는 이 행복의 본질, 모든 것을 뚫고 이어지는 이 행복의 연속성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영원한 행복이요, 최후의 원수, 곧 죽음과 그 너머에 놓인 것까지 상대할 수 있습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인 불경건하고 세속적이고 죄악 된 삶, 즉 겨는 정말 딱하다는 얘기를 계속했습니다. 겨는 아무 특성이 없고 시인이 묘사하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철저히 대조를 이룹니다. 그는 겨가 철저히 무가치하고 우리에게 어떤 유익도 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겨는 바람에 흩날립니다. 그리고 겨는 결정적으로 재앙만을 초래합니다. 오늘은 시인이 이 두절을 통해 제시하는 인생의 끝에 집중해 보고자 합니다.
2. 갈등 심화: 인생의 끝.
불경건한 사람, 죄인, 악인, 오만한 자, 불신자, 자연인, 또는 뭐라 부르건, 이 모든 용어는 성경의 이 대목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나옵니다. 이 겨와 같은 사람의 궁극적 문제는 그가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그는 현재를 위해서만 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는 결코 앞을 내다보지 않습니다. 당장의 행복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결과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얻을 수 있는 것만 원합니다. 성경에는 이 모두를 가리키는 용어가 있습니다. 골 3:5절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한마디로 땅에 있는 지체에 대한 무절제한 욕심입니다. 기다리지를 못합니다. 지금 가져야 직성이 풀립니다. 성경은 죄인들을 다루는 모든 곳에서 그들은 인생을 현재밖에 보지 못하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람들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나아가 인생의 끝을 살피고 직시하기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현재를 위해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순간을 위해 살자.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이것이 그들의 전형적 태도입니다. 앞을 내다보고 어떤 일이 일어나고 어떤 결과에 이르게 될지 생각해 보라는 제안과 가르침을 싫어합니다. 그들이 결국 죽을 존재이고 끝이 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 설상가상으로 이런 대답이 돌아옵니다. "괜찮아요. 난 그건 걱정하지 않아요.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고, 더 이상 말할 거리도 없어지니까요." 보이지 않는 영역, 영적 영역을 믿지 않습니다. 내세를 믿지 않습니다. 이 세상만을 믿습니다. 저는 이런 견해를 가진 이들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자신들이 말하는 내용에 대해 아무런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생이 유일한 삶이고 유일한 세상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생각이 옳음을 증명할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고작 추측과 이론과 가정에 모든 것을 겁니다. 허세에 사로잡혀 개의치 않는다고 말하고, 귀를 닫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쓸 수 있는 단어는 '어리석음 즉 바보'입니다. 성경은 인생의 통일성을 항상 강조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과거와 현재를 생각하는 데서 멈추지 말라. 미래를 내다보고 앞을 바라보라." 성경은 단편적인 메시지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여러분이 미래를 생각하는 데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 좋은 시간을 보내고, 눈앞의 것을 즐기고 지금 마음에 드는 것을 가지라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다. 아니야. 앞을 내다 봐라. 이것을 즐기기 전에 어떤 결과가 따라올지 먼저 생각해라. 무슨 일이든 하기 전에 그에 따라올 수 있는 영향, 결과, 파장을 먼저 숙고해라. 인생은 전체이고, 좋든 싫든 하나의 통일체이다. 과거이고 현재이고 미래이다. 청년, 중년, 노년이 있다.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어간다. 전체가 있다. 그것 모두를 숙고해라. 어떤 지점에서 생각을 멈추지 말아라." 이것이 성경의 첫 번째 강조점입니다. 두 번째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 모두를 관통하는 메시지입니다. 이 세상은 일시적인 곳에 불과하고, 이 땅에서 우리는 순례자이고 이방인이고 여행자이며, 현세와 이 세상 너머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고 우리는 그 세상 즉 본향인 천국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5절“불경건한 사람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위대하고 근본적인 메시지 중 하나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습니다. 네 번째는 우리의 영원한 운명, 이 세상을 떠나서 가게 되는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 거기서 맞이할 운명은 이 세상에서의 삶과 태도로 결정된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시편 기자의 논점입니다. 그는 어떤 존재인가, 어떻게 사는가 등을 가지고 경건한 사람과 불경건한 사람을 비교합니다. 그 모든 것의 결과가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둘은 끝내 대조적인 운명을 맞이합니다. 참으로 복 있고 행복한 사람은 모든 것을 고려하고 모든 것을 준비한 사람입니다. 끝, 죽음, 그 너머에 있는 것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것이 행복과 복의 비결이라고 말합니다. 인생은 쪼갤 수 없습니다. 전체를 고려해야 합니다. 인생은 흘러가는 강물처럼 움직입니다. 정말 복을 받고 행복해지고 싶다면, 시작뿐 아니라 끝도 숙고해야 한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전체를 바라봐야 합니다. 인생은 모두 하나로 이어져 있고, 죽음 너머에서 여러분에게 벌어질 일은 지금 여기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것이 바로 시편 1편의 메시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생에 대해 히2:15절에서"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셰익스피어도 이렇게 말합니다. "미지의 그 나라가 두렵구나. 그 지역에서 돌아온 길손 없으니." 죽음을 꿰뚫어 보는 믿음이 없으면 이 세상에서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 순간이 아무리 행복해도, 죽음의 위협, 죽음의 가능성은 언제나 있기 때문에 긴장을 풀 수가 없습니다. 인생은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상태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고려하는 인생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참으로 복된 사람이 됩니다.
3. 전환: 심판의 존재.
이제, 인생의 끝의 문제를 숙고해 봅시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첫 번째 사실은 심판의 존재입니다. 5절'그러므로 악인 즉 불경건한 사람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합니다. 사람은 책임 있는 존재입니다. 동물이 아닙니다. 책임 있는 존재이므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심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현대인과 현대 정신이 이 말에 극도의 혐오감을 느낀다는 것을 압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직도 저런 말을 하다니 놀랍군요! 전에는 설교자들이 심판을 엄청나게 들먹였고, 사람들에게 겁을 줘서 종교적이 되게 만들었죠. 지옥과 형벌에 대한 생각들로 공포에 사로잡혀 복음을 믿고 착하고 경건하게 살도록 유도했어요.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그것이 전부 엉터리라는 것을 알아요.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심판이라는 것은 없으니까요.”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근거는 이렇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심판은 그분의 사랑과 절대 양립할 수 없어요." 그러나 심판에 대한 이 반론은 하나님과 하나님 사랑에 대한 완전히 잘못된 견해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에 관해 정말로 무엇을 아십니까? 사랑의 하나님이 동시에 정의롭고 의로우신 하나님일 수 없고 심판자일 수 없다니, 도대체 무슨 권리로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아는 모든 것은 그분이 자신에 관해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신 내용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성경에 나와 있는 것뿐입니다. 자연에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드러나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저는 자연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보고, 그분의 능력을 보고, 그분의 설계를 봅니다. 역사에서도 그분을 볼 수 있습니다. 섭리 가운데 하나님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식으로 아는 하나님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미지의 하나님입니다. 그분의 성품을 정말 알려면 성경을 펴야 합니다.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 기자들은 "이것이 내가 하나님에 관해 생각하는 내용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내게 계시하셨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시내산 정상에서 모세를 부르셨고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심판을 조화시킬 수 없어서 심판을 믿기 힘들다고 말한다면, 이러한 입장 전체는 무지와 추측, 희망사항, 믿고 싶은 바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아무 근거가 없다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심판이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에덴동산에 두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 너희가 내 법을 어기면 나는 너희를 동산에서 쫓아낼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살이가 왜 이렇게 빡빡합니까? 그 이유는 인생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땅을 저주하셨습니다. 인간을 낙원에서 쫓아내셨고 그가 되돌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 화염검과 그룹(천사)들을 두셨습니다. 심판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모습입니다. 구약성경은 심판으로 가득합니다. 개인들에게도,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도 심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그들을 바벨론의 포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심판입니다. 신약성경에서도 동일한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앞에 등장하는 첫 번째 설교자는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눅3:3절'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했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등의 무리가 찾아오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눅 3:7절"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것이 신약성경에 나오는 첫 번째 심판 경고입니다. 이것이 왜 구원의 복음입니까? 한 가지 이유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다가올 심판과 진노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심판을 전하셨습니다. 그분은 요 5:28-29절에서 무덤에 있는 자들이 다 일어날 것이고, 그들이 일어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심판은 둘 중 하나입니다. 정죄의 심판이거나, 영생의 심판입니다. 심판은 모든 사도의 글에도 나옵니다. 오순절에 베드로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것은 기독교회 역사상 최초의 설교였습니다. 행 2:40절"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사도 바울도 같은 말을 전했습니다. 히 9:27절에서“9:27절에서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베드로도 주의 날이 올 것이라는 데 동의합니다. 벧후 3:8절"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그러나 주의 날은 올 것입니다. 심판을 부정하는 현대의 모든 반론에 대한 답변은 분명합니다. 심판은 사실입니다. 성경의 모든 부분에 펼쳐져있는 엄중한 사실입니다. 불경건한 자들을 따르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는 곧 죽게 되어 심판과 마주해야 합니다.
4. 대단원: 심판의 결과
왜 성경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심판의 내용이 기록된 것은 아직 시간이 있는 동안 우리에게 경고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전체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입니다. 우리 모두가 본질상 불경건하고 모두가 죄악 된 존재이므로, 이 상태로 죽으면 그 멸망으로 그 영원한 지옥의 형벌로 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분의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회개하라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돌아오라고 촉구하는 메시지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십시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엎드려 죄를 고백하고 자신에게 변명의 여지가 없음을 인정하십시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의 아들,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행 16:31절"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고후 6:2절"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문은 아직 닫히지 않았습니다. 불행한 지옥으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인생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으면 즉시 용서를 받습니다. 하나님이 받아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됩니다. 이것이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심판이 기록된 이유입니다. 경고하기 위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이키고 그분의 귀한 아들의 복음을 믿으라고 부르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이 왜 이 세상에 오셔야 했는지 아십니까? 심판을 머릿속에 그려보셨습니까? 하나님 여전히 부르고 계신 겁니다.. 지금이 구원의 날입니다. 이 말씀을 믿으시고 저와 함께 이렇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신학자이며, 경건 운동과 현대 선교의 선구자였던 친첸도르프 백작의 고백입니다. “예수님, 주의 보혈과 의로우심은 저의 아름다움이며 제 영광스러운 옷입니다. 불타는 세상 한가운데서 이렇게 좋은 옷을 입은 저는 기쁨으로 머리를 듭니다. 저는 심판의 날에 담대히 설 것입니다. 그 누가 저를 고발하겠습니까? 주를 통해 저는 죄와 두려움에서, 죄의식과 수치심에서 온전히 벗어났습니다.” 이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는 안전합니다. 누구도 우리를 어떤 죄목으로도 고발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이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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