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롬 1:16-20
2. 명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믿는 모든 이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선언적 명제
3. 제목: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이신칭의가 필요한 이유
1. 갈등: 위대한 사람을 변화 시킨 복음
기독교회 역사와 기독교회의 가장 주목할 만한 지도자들의 생애에 있어서 로마서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 책은 없습니다. 저 위대한 성자 어거스틴 (St. Augustine)이 개종한 것도 롬 13:11-14절을 읽음으로써 되어진 것입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증세 카톨릭의 속박을 풀고 기독교 개혁의 지도자가 된 것은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 롬 1:17절의 참된 의미가 깨달아 짐으로 써였습니다.. 로마서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사도는 그것을 1장 16절과 17절에서 아주 명백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에 대한 기쁜 소식입니다. 루터는 이 교리를 “교회의 성패를 좌우하는 시금석”이라 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 교리는 사람들의 구원과 하나님에 대한 화해의 길을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시요 구세주이신 그의 아들의 행하심을 기초로 해서 복음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은혜로 용서하시며 사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이론이나 사상이 아닙니다. 또한 어떤 인간의 철학과 같지 않으며, 그것은 신 구약 모든 성경 가운데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2. 갈등 심화: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함.
어떤 이들은 율법적인 유대인 바울이 기독교 메시지의 진수를 수정하여 이신칭의 교리로 변조시켰다고 주장합니다. 그 주장에 대한 분명한 대답은 이 칭의에 관한 메시지가 성경의 구약에서 신약 끝까지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롬 3:21절에서 바울은 “이제는 율법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다른 말로 하면, 칭의 구원이 구약을 통해서 증거를 받았음을 바울은 강하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약은 구약 속에 감추어 있으며, 구약은 신약 속에서 뚜렷이 만개되었고 드러났다." 우리 주님의 가르침 속에서도 그 점은 똑 같이 나타납니다. 왜 주님은 세상에 오셨습니까?? 마 20:28절"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이 이신칭의 교리가 율법적인 유대인 바울에게만 국한된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바울은 롬 1:16절“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물론 이 말은 복음을 매우 자랑한다는 뜻입니다. 왜 그는 그렇게 느꼈습니까? 16절"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며, 첫째는 유대인에게 요,, 또한 헬라인에게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의 주제는 바로 그것입니다. 롬 1:17절"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바울 사도는 복음을 자랑합니다. 왜요?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메시지는 사람에게 비롯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복음을 믿는 모든 자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롬 1:17절“......1:17절“...... 모든 믿는 자에게.... 첫째는 유대인이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그러나 이신칭의 복음이 확실하고 확고한 구원의 길이기 때문에 더욱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즉각적으로 하나의 질문에 직면했으니 왜 칭의 구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는 18절에서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18절"하나님의 진노가 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솟아 나타난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구원과 관련된 인간의 이중 문제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복음을 그렇게 자랑하고 감격적이 된 것은 이 복음만이 인간의 이중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가 때문입니다. 첫째 문제는 모든 불경건한 자들과 불의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인간이 실제적으로 불경건하고 불의한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불경건과 뷸의에 대한 정의는 무엇입니까? “불 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나 신앙심이 결여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그의 존재와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포함하며, ”불의"는 하나님의 법과 의로움에 어긋나는 모든 행동이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도덕적, 윤리적 기준을 위반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여러분들은 사도가 불경건을 먼저 놓았다는 것과 불의는 불경건에 뒤따라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그에게 있어서 첫째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 즉 불경건의 문제입니다. 이 점은 특별히 현대 교회에 있어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현대 교회와 세상에서의 현대적 접근방식은, 인간 고통의 실제적인 문제가 불의 문제 하나뿐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세계는 인종문제, 정치적 문제, 경제 문제 등으로 인해 갈기갈기 찢어졌으며 나눠졌다고 진단합니다. 그런데 이 불의한 일을 치료하는 것이 교회가 담당해야 할 첫 번째 임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현실참여가 우선이라고 주장하는 근거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사도가 첫째로 지적한 불경건,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관계라는 것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이 점이 오늘날 교회의 잘못된 입장입니다. 바울은 ’불경건‘은 ’불의‘’ 불의‘보다 우선합니다. 왜냐하면 불의는 불경건의 결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현대 교회의 모든 비극입니다. 인간 고통 자체의 근본적인 뿌리 즉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인 불경건을 치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나타난 증상들 즉 불의만을 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잘못된 정치적, 사회적, 교육적, 경제적, 문화적인인 처방을 가지고서는 결코 진정한 인간 고통의 뿌리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3. 전환: 복음만이 인간의 문제에 대한 해답
우리 주님께서 제일가는 계명이 무엇이냐는 서기관의 물음에 “첫째는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라고" 대답하셨던 것입니다. 둘째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첫째 사랑하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그의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지 못합니다. 불 경건의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불의의 문제는 결코 해결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당면한 제일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 즉 심판의 문제입니다. 이 점이 출발점입니다. 복음 전도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노를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예수에게 오라고 초대할 때, 예수를 하나의 친구로서나, 육신을 치료하는 자로나, 한 조각의 평안을 주는 자로만 소개해서는 안됩니다. 그분은 구세주이십니다. 그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오셨습니다.”.” 그러면 왜 인생은 구원을 필요로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 즉 심판이 모든 사람의 불경건과 불의에 대하여 임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모든 견해를 혐오합니다.. 현대인은 하나님의 공의와 의의 사상, 그리고 심판받는다는 사상을 거부합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현대인은 율법에서 모든 시선을 돌렸으며, 그것을 혐오한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죄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혐오를 강조합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나타내는 하나의 계시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너희는 거룩하라. 왜냐하면 내가 거룩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거룩해야 할 이유는 죄가 하나님을 거스리는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며,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그 안에 어두움이 조금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교회가 이 점을 잊어버려서 길을 벗어나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극적인 상황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여러분들은 주님 자신의 가르침 속에서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자, 나는 너희에게 어떻게 기도할까를 가르쳐 주리라. 너희가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신 분입니다. 그 점을 주님께서 사람들이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로서 친히 기도하실 때에 하나님을 부르신 방식은 “거룩하신 아버지”였습니다. 이 점은 바울 사도의 모든 경우에서 그러합니다. 그가 전파한 복음을 자랑하는 것은 이 복음만이 모든 경건치 않으며 불의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문제를 대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되게 하며 그 결과 사람과의 관계도 바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하나님의 진노가 18절“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한 자들에게" 나타났다고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진노는 어디에서 나타났습니까?? 구약 에덴동산에서 나타났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완전하게 창조된 아담과 하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활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의 최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불순종하였고, 그를 배반하고는 유혹하는 자 마귀의 말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에 대한 진노 하시어 동산에서 인간을 내쫓으셨으며, 그들이 그 대가로 이 땅에서 온갖 종류의 갈등, 전쟁, 병, 그리고 땀을 흘리야 하며,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죄를 범한 영혼은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만일 죄를 범하면 그는 반드시 그 죄에 대한 대가와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경로에 대하여 특별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롬 1장 24-27절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내어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이 시로다. 아멘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붙일 듯하며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여기 ’’ 마음의 정욕대로 즉 마음의 욕심대로 내어 버려 두사‘라는 말에 주목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사실상 ’’ 너희가 나 없이도 살 수 있다 생각하며 장담한다면, 그래해보아라. 그리고 네가 그것으로부터 무엇을 얻을 것인가를 알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의 지식과 교만 속에서 하나님을 등져 왔으며, 그것은 ‘불경건의 죄목’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노라는 사람들까지도 자신을 계시하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좁은 소견을 따라 온갖 종류의 피조물 즉 돈, 권세, 명예, 지식, 사람, 직업 등을 자기 신으로 만들어 섬기며 따라갑니다. 그들은 불경건에 대한 죄를 짓고 있으며, 따라서 온갖 종류의 불의 즉 도덕 윤리적 죄가 자동적으로 뒤따라 오는 것입니다. “내어 버려 두사”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세상 형편에 대한 유일한 설명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심판을 그만두시고 제멋대로 내버려 둔 것입니다. 성경적인 가르침은 사람이 죄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해 어떤 한계를 설정하시고 그것을 제지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에 의하면 어떤 시기가 되면 하나님께서 싫어하고 미워하는 모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확증시켜 주기 위한 거의 억제를 그만두시고 사람이 그 자신의 악한 생각대로 행하도록 내버려 두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 없는 인간의 종말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 교리를 소개하는 사도의 방법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이 '부패한 심령'대로 놔두시는데, 그것은 벽에다 머리를 부딪히게 하여,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겸손해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상태가 어떻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한 것은 불경건과 불의의 순서, 즉 불경건이 불의보다 앞선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망각하지 맙시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을 등지고 조물주 보다 피조물을 더 좋아합니다. 인간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인간이 피조물인 인간의 산물인 과학과 기술을 ”영원히 찬송받으실 조물주”보다 더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들은 상실한 심령대로 버림을 당한 것입니다. 불경건과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가지도록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십니다. 24절의 정욕을 NIV성경은 ‘‘죄된 욕망’ ‘과도한 욕망’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나쁜 것을 욕망하려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과도하게 욕망하여 숭배와 섬김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회생활의 경력에서 성공한 사람은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을 최고로 칩니다. 성공이 자신의 모든 삶을 지배합니다. 그는 자신의 과도한 욕망이야말로 축복이라고 계속 생각합니다. 자신의 신이 되어 버린 성공을 쫓느라 결혼 생활 가족과 친구 관계에 금이 가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하나님이 우리를 벌주고 싶을 때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십니다.. 우리가 신으로 삼는 것에 몰두하도록 내버려 주십니다. 이어서 바울은 우리들에게 이방인들의 처참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롬 1: 28-32을 보십시오. 특히 동성연애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오는 역겨운 죄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대에만 해당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 만연되어 있는 동성연애에 대해 설명한다면, 그것은 상실한 심령대로 인간을 버려두는 하나님의 진노의 또 다른 모습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법입니다. 26-27절 역리를 쓴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과도한 욕망대로 내버려 두신 하나님의 진노가 드러난 것입니다. 과도한 욕망은 우상 숭배입니다. 롬 1:28-32절은 모든 인간은 죄인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인간의 전적 타락의 교리라고 부릅니다. 우리 가운데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인생이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인간에게 이신칭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구원 얻을 길이 없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4. 대단원: 회개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익
그러므로 사람이 얼마나 많이 진보했거나, 또는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이 사회적인 개혁을 단행했든 간에, 또는 얼마나 많이 불의와 악한 것 완화시켰든 간에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을 떠난 그의 어리석음을 회개케 하거나 깨닫게 하지 못한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전혀 무익한 것입니다. 결국 모든 인생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위험한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비참한 성태를 보시고 불경건하고 불의한 우리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불경건하고 불의한 우리 인간은 율법의 행위 즉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에, 내 대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을 만족 시켜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며 믿을 때 그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여겨 구원을 주시기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실패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이신칭의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과 나와 바른 관계를 세우고 그 결과 다른 사람과도 관계도 바로 세우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을 구원한 이 복음을 감격하며 자랑한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이 여러분도 구원하셨음을 믿습니까? 믿으신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토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자신 있게 복음을 전합시다. 그리고 하나님께 이 은혜에 대한 감사 찬양 영광을 돌리심이 마탕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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