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롬 14:8, 고전 6:19-20, 벧전 1:18-19, 요 8:34-36,
마 10;28-29, 롬 8:28, 롬 8: 16, 겔 36: 26-27
2. 명제: 참된 위안은 내가 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임을 아는 참된 지식에 근거합니다. 선언적 명제
3. 제목: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의 전제
갈등: 기억합시다.
성경의 교리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가르침과 원칙입니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 구원, 용서, 창조 등등입니다. 교리를 모르는 신앙은 뼈가 없는 연체동물과 같습니다. 쉽게 이단에 넘어갑니다. 1563년에 작성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는 독일 지역에서 만들어진 칼빈주의 즉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입니다. 프레더릭 3세가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인 우르시누스와 궁정 설교자인 올리비아누스에게 본 요리 문답을 작성하도록 제시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교회와 학교에서 가르칠 교리문답으로 출판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본 신앙고백서의 가치는 화란 개혁파 교회에서는 이것을 청소년 신앙 교육을 위해서 사용하기도 했으며, 주일 저녁 설교로도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은 1609년 미국 땅에 나타난 최초의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이기도 합니다. Frederick 왕은 이 교리문답이 모두 성경에 근거하고 있음을 천명하기 위해 이보다 더 성경적인 것을 보여주는 자가 있다면 기꺼이 하나님의 진리에 따르겠다고 외쳤다고 합니다. 본 신앙고백서는 당시의 칼빈주의 즉 개혁교회 신앙인들에게는 단순히 교리적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 깊이 연결된 실천적인 삶에서의 고백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129개의 문답이 담겨 있습니다. 1문.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은 “내가 내 것이 아니요, 몸과 영혼이 다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2문. 이러한 위로 가운데, 복된 인생으로 살고 죽기 위해.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1부 첫째는 나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가 (3~11문). 2부 둘째는 나의 모든 죄와 비참함으로부터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12~65). 3부 셋째 그러한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하는가? (88~129) 요리 문답은 1부 (3~11문)에 곧장 들어가지 않고, 그 전에 1, 2문을 먼저 제시합니다. 이것은 요리 전체 문답의 "전제“입니다. 이 전제를 잘 파악해야 나머지 공부가 쉽습니다. '전제'란 어떤 이야기를 순조롭게 진행하기 위해 서로가 기본적으로 일치시켜야 하는 일종의 '약속'입니다. 만약 어떤 대화에서 서로 전제가 다르다면 이야기는 더는 진전되지 않고 제자리걸음을 하게 됩니다.
2. 갈등 심화: 참된 위안은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요?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은 '위안'에 대한 이야기로 그 첫 줄을 시작합니다. 이 요리 문답은 1563년에 작성되었으니까 약 450년 전에 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오래된 문서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성도에게 어떤 유익을 줄 수 있을까요? 만약 오늘 우리의 삶에 위안이 필요 없다면, 이 요리 문답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했겠지요. 여러분의 삶에는 위안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요리 문답 첫 부분을 어떻게 시작합니까? 1문.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인가요? 답은 내가 내 것이 아니요, 몸과 영혼이 다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그의 성령으로 그분은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 주시고,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즐거이 그리고 신속히 그를 위해 살도록 하십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의 [시작]인 제1문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려 하나니” 빌 1:20절 표현이 그대로 묻어납니다.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참 멋진 표현입니다. 답변의 특징은 '당신'의 유일한 위안을 물었을 때,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이야기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에요!"라고, 나 자신을 부인해 버리니까 그 순간 감동이 옵니다. 게다가 이 부분의 답변은 삼위 하나님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정교한 구조입니다. 이제 본격적인 내용으로 들어가겠습니다. 1문: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롬 14:8절에서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고전 6:19-20절에서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벧전 1:18-19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고.’ 요 8:34-36절에서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셨습니다.’ 마 10:29-30절에서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시며,’ 롬 8:28절에서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롬 8:16절에서 ‘그러하므로 그의 성령으로 그분은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 주시고,’ 겔 36:26-27절에서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즐거이 그리고 신속히 그를 위해 살도록 하십니다.’ '위안'에 해당하는 독일어 "Trost"는 '위로'로 번역되는데 '위안'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위로는 기본적으로 고생을 많이 하거나 슬픔을 당한 사람들에게 공감을 표하거나 격려하는 것을 뜻한다면, 위안은 생사의 기로에 있는 것과 같은 극한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안심하고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를 시편 23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4절"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위안은 결국 누군가에 대한 확고한 신뢰에서 비롯된 흔들림 없는 평안입니다.
3. 전환: 누구에게 위안이 필요할까요?
이 세상에는 위안이 그다지 필요 없는 사람도 많습니다. 대부분 사람은 바로 내일 일을 걱정하며 살고 있지만, 또한 적지 않은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아무런 걱정 없이 살아갑니다. 불신자 중에는 어떻게 보면 신자들보다 더 태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세상. 걱정하며 사는 것보다 하루하루 즐기며 사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가끔은 부럽기도 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을까!?" 그러나 그런 삶에는 치명적 약점이 있는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쉬울 것 없고 걱정이 없는데, 어떻게 그리스도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믿는 사람 중에도 비슷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소위 긍정적 신앙이 그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덕분에 모든 것이 항상 잘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업을 해도 잘 되고, 아이들도 항상 공부를 잘하고 튼튼하고, 직장에서 승진하고, 병도 들지 않고, 물론 우리는 긍정적 사고를 해야 합니다. 잘 될 것이라는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사업을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열심히 하면 시험에 합격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는데, 어떻게 공부를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긍정적 사고를 [절대화]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즉,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근거 없이 막연히 잘 될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물론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성공한 이야기도 종종 듣습니다. 그러나 긍정적 믿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하고 좌절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그렇다면, 우리의 참된 위안은 어디에서 올까요? 참된 위안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에게 위안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 세상이 우리에게 위안을 추지 못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삶이 위안으로 가득 차 있다면 굳이 위안이 필요 없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세상이 우리에게 적대적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삶은 항상 사고와 위협과 재난과 범죄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위협을 받을지 모릅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어려움이 닥칠 때 낙심하여 하나님을 떠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위안은, 그런 악이나 위험이 닥치더라도 그것 때문에 좌절하지 않고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참된 위안은 올바른 지식에 근거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지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막연히 "괜찮아, 잘 될 거야!"라는 식은 참된 위안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확실한 근거]입니다. 근거를 정확히 알고 있을 때, 비로소 흔들리지 않는 참된 위안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필요한 위안은 항상 적용될 수 있어야 합니다. 요리 문답은 "살아서나 죽어서나"라고 말합니다. 만약 우리 삶이 이 세상뿐이라면 우리에게 필요한 위안은 '세상을 살아갈 동안 필요한 무언가'였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돈 버는 것이, 병든 자에게는 낫는 것이, 학생에게는 공부 잘하는 것이 위안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단지 일시적일 뿐입니다. 돈을 벌고 나면 돈이 더는 위안을 줄 수 없고, 병이 낫고 나면 건강이 더는 위안이 될 수 없고, 졸업하고 나면 더는 성적이 위안일 수 없습니다. 요즘 세상에 무엇보다 효과적인 위안은 '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알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 그는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을 정도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심중에 말합니다.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헤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하자."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오늘 저녁에 다시 취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는 아마도 죽는 그 순간까지 아무런 염려 없이 살았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위안은 이런 위안이 아닙니다. 죽고 나서도 필요한 위안, 즉 영원한 위안입니다. 돈은 살아 있을 때만 위안이 됩니다. 죽음 이후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참된 위안은 올바른 지식에 근거해야 합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받았던 위안이, 영원한 세상에서의 위안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원한] 위안입니다. 영원한 세상에서도 우리의 복된 삶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위안 말입니다. 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세상에서 위안이 되지만, 저 세상에서는 위안이 되지 못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세상에서도 위안이 되고, 저 세상에서도 위안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고르시겠습니까?
4. 대단원: 내가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
요리 문답 1문은 성도의 유일한 위안으로 아주 차원이 다른 대답을 합니다. [내가 내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에 있다는 진술입니다. 이것만 봐도, 세상과 기독교가 근본적으로 가치관이 다르다는 것을 곧바로 알게 됩니다. 사람들은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자기 인생을 자기 원하는 대로 살고자 합니다. 그것이 자유라고 생각하고, 원하는 대로 마음껏 하며 사는 것이 복된 삶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들은 [가장 기본적인 진실]도 부정합니다. 우리 삶의 시작은 우리가 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삶의 마지막도 우리가 정할 수 없습니다. 죽고 싶어서 죽는 경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우리가 정할 수 없다면, 어떻게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노래할 수 있을까요? 우리 인생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속해 있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입니다. 이 사실은 죽어서도 변함이 없습니다. 삶이 아무리 힘들고 고달파도 위안 속에 살 수 있고,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평안히 눈을 감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천국에서도 우리가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그곳이 단순히 좋은 장소이기 때문이 아니라, 천국에서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은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우리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 자신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여 마귀의 권세에서 해방을 시키셨고, 성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 구원을 이루시며, 성령을 통해 영생을 확신시키셔서 우리가 마음을 다하여 주를 위해 살게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유일한 위안입니다. 그리스도는 나의 죗값을 치르시고, 성부는 나를 보호하시고 마귀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시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구원을 이루게 하시며, 성령님은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 주시고 마음을 다하여 주를 위해 살게 하십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에 나타난 구조는 삼위 하나님입니다. 1. 그리스도의 구속입니다. “우리의 죗값을 치르시고 마귀의 권세에서 해방”. 우리는 이것을 [구속]이라고 표현합니다. 구속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죄의 대가를 대신 치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결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사탄에게 속해 있었던 이유는,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소유였으나 사탄의 소유권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죄가 있는 한 하나님도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니까, 그냥 사탄을 멸망시키고 우리를 구원하실 수는 없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죄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리고 그 벌로 사탄의 종노릇을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보혈로 우리 모든 죄의 값을 대신 치르십니다. 이 때문에 사탄은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할 명분을 잃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영원한 불안의 궁극적 원인인 '죄 문제'를 없해셨습니다.. 우리를 해방시켜, 자신의 소유로 삼으셨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어느 누구도 우리에 대해 소유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2. 성부의 돌보심입니다. "지키시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심"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가 구속받았다 하더라도, 죄를 지으면 또다시 마귀의 권세에 빠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요리 문답 1문은 그런 걱정을 해소해 줍니다.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 몸과 영혼이 모두 온전히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일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심지어 머리털 하나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으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머리털은 우리 몸에서 가장 사소한 것입니다. 그중에 하나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이제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납니다. 궁극적으로 그 모든 것(좋은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의 소유가 되었을 때와 그렇지 않았을 때의 궁극적인 차이입니다. 3.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영생에 대한 확신과, 주를 섬기게 하심”. 성령은 구속받은 자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영생을 확신시킵니다. 죽음은 끝이나 소멸이 아닙니다. 새로운 상태로의 이전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속함을 받은 자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영생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요 3:16절에서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셨고 그를 믿는 자에게는 영생을 주시는데”, 이 약속에 대한 확신을 우리는 성령님을 통하여 얻게 됩니다. 우리가 매 주일 예배시간에 고백하는 사도신경에서, 성령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마지막 고백이 바로 영생입니다. 영생은 한 번 얻으면 취소될 수 없습니다. 취소된다면 그것은 영생이라고 할 수 없겠지요. 이 영생에 대한 확신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성령을 통해 확신합니다. 영생은 단순히 오래오래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지만, 말씀과 성례를 통하여 그것을 이미 누리고 있습니다. 이 외적인 수단 속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시고 이것을 통해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이 놀라운 복에 대해서는, 앞으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배움으로 더 풍성한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위해서 기도하시고, 기대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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