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에 대한 이론/네러티브 설교

탕부 하나님 3

wordlove 2023. 3. 12. 15:05

1. 본문: 눅 19:10

2. 본문 요약: 두려움에 기초한 명종은 불순종만큼 위험합니다.

3. 본문 주제: 도덕주의

4. 본문 테마: 사랑 없는 도덕주의

5. 명제: 사랑을 모르는 도덕주의는 치명적인 영적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가능성의 명제)

6. 목적: 첫째 형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소개하여 그 위험성에서 교훈을 얻도록 돕기 위해

7. 질문제기: 사랑을 모르는 도덕주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8. 전환 문장: 사랑을 모르는 도덕주의는 치명적인 영적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사랑을 모르는 도덕주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9. 대지

10. 제목: 사랑 없는 도덕주의

 

갈등

예수님은 죄와 구원을 '잃음찾음'의 은유로 말씀하신 적이 많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예수님이 종교 지도자들에게 들려주신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첫 번째 비유의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되찾고, 두 번째 비유의 여인은 잃었던 동전 하나를 되찾습니다. 여태 보았듯이 세 번째 비유의 두 아들은 방식만 다를 뿐 둘 다 잃어버린 존재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눅 19:10“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 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잃어버려진 상태란 무슨 뜻입니까? 이 비유에서 동생의 잃어버려진 상태는 그의 종착지가 된 돼지우리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는 무절제하고 어리석은 방종 행위 때문에 친구와 돈과 자원이 다 바닥났습니다. 삶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마침내 동생은 자신이 길을 잃었음'을 깨닫고 돌아가 삶을 재건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또 다른 잃어버려진 바 된 상태를 깨우치기 원하십니다. 이를 일컬어 '형의 잃어버려진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또한 동생의 경우 못지않게 세상을 불행과 불화에 빠뜨립니다. 형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 상태의 특징을 알 수 있습니다. 형은 화가 났습니다. 그가 하는 말마다 원망이 뚝뚝 떨어집니다. 형 같은 태도를 품은 사람의 첫 번째 징후는 삶이 자기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그냥 슬픈 정도가 아니라 분노와 원한이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형들은 자신이 착하게 살면 삶이 행복해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자신이 기준에 부합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면 하나님이 평탄한 길을 주실 의무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면 만일 당신이 형인데 삶이 엉뚱하게 풀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의 도덕 기준대로 잘 살아왔다고 생각할 때는 하나님께 격분할 것입니다. 반대로 뻔히 본인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 상태에서 삶이 잘못된 경우라면 어떨까요? 그때는 자신에게 몹시 화가 나서 자기혐오와 내적 고통에 빠질 것입니다. 역경이 닥쳐왔는데 당신의 삶이 아주 선했는지에 대해 자신이 없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미워하다가 자신을 미워하는 양극단 사이를 비참하게 왔다 갔다 할 것입니다. 비유 속 형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의 선행에 보상이 따르기를 바라며, 보상이 없으면 혼란과 분노에 휩싸입니다. 당신도 선행과 반듯한 삶을 공로로 내세워 하나님께 행복한 삶을 얻어 내려한다면,, 분노에 삼켜지고 말 것입니다. 삶이란 결코 우리의 바람대로 풀리지 않기 때입니다. 당신은 늘 마땅히 받아야 할 몫보다 덜 받았다고 느낄 것입니다. 늘 남들의 삶이 더 잘 풀리는 모습을 보며 이렇게 따질 것입니다. '저 사람은 잘되는데 왜 나는 이 모양인가?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말이다!' 이런 원망은 당신 탓입니다. 그 원인은 다른 사람의 형통한 삶이 아니라, 당신이 자신의 행위로 삶을 통제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형은 보다시피 우월감에 찌들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도덕적 이력이 창녀들과 놀아난 자보다 훨씬 낫다고 지적합니다. 동생을 더는 동생으로도 인정하지 않는 경멸에 찬 말투입니다. " 아버지의 아들이 "형들은 자아상의 근거를 부지런한 노력, 도덕성, 소속된 엘리트 집단, 아주 똑똑한 지식 등에 둡니다. 그러니 그런 같은 요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 우월감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어떤 집단이 참된 교리, 바른 예배 방식, 올바른 윤리적 행동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은총을 베푸신다고 믿는다면, 그들은 이런 요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 이면에는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자세가 숨어 있습니다. 리처드 러블레이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 하나님이 영적 성취도와 무관하게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받아 주신다는 확신이 없는 사람들은 무의식 중에 극도로 정서가 불안하다. 불안한 정서 때문에 그들은 교만해지고, 자기 의를 변호하는 데 열을 올리며, 다른 사람들을 매정하게 비난한다. 다른 문화 유형과 다른 인종을 혐오하는 게 그들에게는 쉬운 일이다. 그래야 억압된 분노를 발산해 자신의 정서적인 안정을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형의 태도는 인종차별과 계급주의를 유발할 뿐 아니라 개인적 차원에서 용서에 인색한 비판적 자세를 낳습니다. 이런 형은 동생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동생이 사회에서 집안의 위상을 실추시키고, 가문의 명예에 먹칠하고, 가산을 날렸다는 이유에서 입니다.. 형은 동생이 눅 15:30 " 창녀들 "과 놀아나는 동안 자신은 집에서 깨끗하게 살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나라면 저렇게 악한 짓은 절대로 못 한다!'라고 심중에 되뇝니다. 그는 상대를 향해 우월감을 품은 상태에서 그 사람을 용서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화를 잘 못 참는 사람인데 당신과 똑같이 화 잘 내는 사람을 보았다면 그럴 때는 용서하기가 쉽습니다. 당신도 전혀 나은 바 없는 사람임을 스스로 알기 때문입니다. 나도 똑같이 못됐는데 어떻게 남을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형의 죄와 하나님을 향한 반감은 도덕적 행동 밑에 꼭꼭 숨어 있으므로 그들은 누구를 향해서든 당연히 우월감을 느낍니다. 그 근거는 흠잡을 데 없는 자신의 이력에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자의 결혼생활이 전형적인 예입니다. 알코올 중독자는 번번이 가족들을 크게 실망하게 합니다. 중독자의 아내는 고생의 결과로 엄청난 자기 연민과 독선적인 태도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남편을 나 몰라라 하면서도 남편의 술 문제에 대한 죄의 전력만은 늘 붙들고 늘어집니다. 그럴수록 중독자는 더 자기혐오가 깊어져 그 이유로라도 술을 마십니다. 파멸의 악순환입니다. 어쩌면 형에게는 자신의 자아상을 떠받치기 위해 비난의 대상으로 늘 고집불통인 동생이 필요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동생은 잘난 척하는 형 때문에 개과천선하기가 더 어려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동생이 잘못을 인정하고 아버지가 그를 환영해 주자 형은 기존의 구도가 깨졌음을 깨닫고 노기가 충천했습니다. 형이 자신의 본마음을 알았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방식만 다르다 뿐이지 나도 동생과 똑같이 이기적이고 아버지의 속을 썩이고 있어. 나는 우월감을 느낄 권리가 없어.' 그랬다면 그도 아버지처럼 거리낌 없이 동생을 용서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형들은 자신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들의 분노는 스스로 만들어 낸 감옥입니다.

 

2. 갈등 심화

형의 태도를 품은 사람들의 또 다른 징후는 기쁨 없이 두려움에 기초한 맹종입니다. 형은 자신이 아버지에게 순종했다고 자랑하지만 눅 15:29에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라는 말속에 배후의 동기와 태도가 드러납니다. 성경에는 아버지를 섬겨 헬라어 원문의 “둘류오”라는 단어로 '종처럼 섬긴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어떤 일이든 맡은 일에 충실하려면 어느 정도 의무감이 필요합니다. 꼭 해야 할 일인데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면 우리는 대개 성실하기 위해서라도 그 일을 합니다. 그러나 이 형은 오로지 의무감 때문에 아버지에게 순종했음을 보여 줍니다. 기쁨이나 사랑은 간 곳이 없습니다.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것만으로는 보상이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형들은 윤리 규범을 꼼꼼히 지키고 가정과 공동체와 사회에서 모든 전통적인 책임을 다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쁨 없이 노예처럼 일하는 고역입니다. '종처럼 일한다'라는 말에는 강요당하거나 떠밀린다는 어감이 강합니다. 마음이 끌려 자원하는 게 아니다. 종은 두려움 때문에 일합니다. 무력으로 가해질 결과가 두려운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형의 근본 동기입니다. 결국, 형들이 착하게 사는 것은 기쁨과 사랑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입니다. 형의 순종은 종처럼 마지못해 법을 지키는 것에 불과합니다. 두려움 대신 사랑이 동기가 된 사람은 법도 잘 지킬뿐더러 부단히 새로운 방도를 모색하여 기업을 투명하고 정직하게 운영합니다. 두려움에서 비롯된 정직은 세상 악의 근본 원인인 인간의 지독한 이기심을 근절하지 못합니다. 두려움에 기초한 도덕은 오히려 악을 심화시킵니다. 형들의 선행은 결국 사욕을 취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인 형들의 경우는 하나님의 복을 받아 내는 것이고, 세속적인 형들의 경우는 덕스럽고 너그러운 존재로 자처하기 위해서입니다. 형 부류의 사람들은 선행 자체가 즐겁거나 사람들을 사랑해서 선을 행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그들이 양식과 옷을 베푸는 대상은 굶주린 빈민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뿌리 깊은 이기심이 고스란히 건재할 뿐 아니라 두려움에 기초한 도덕이 오히려 이를 더 부추깁니다. 수많은 교회가 험담과 싸움에 시달리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수많은 사람이 외관상 착실하고 반듯하게 살다가 갑자기 심히 추악한 죄에 빠지는 이유는 또 무엇입니까? 겉으로는 사심이 없어 보이지만 그 밑에 엄청난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 같은 태도의 마지막 징후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에게 눅 15:29" 내게는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라고 말합니다. 이 형이 아버지와 맺은 관계에는 춤이나 흥겨움이 없습니다. 선행으로 하나님을 통제하여 구원을 얻어 내려하는 한 당신은 여태껏 자신이 그분께 충분히 착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시고 즐거워하심을 결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이런 확신이 없을 때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입니까? 삶이 잘못되거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마다 당신은 자신이 뭔가 잘못 살아서 그런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또 다른 증상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을 때 기분이 상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처참히 무너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추상적으로 느껴져 당신 삶에서 진정한 능력을 별로 발휘하지 못하다 보니 사람들의 인정이라도 받아야 자신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책감에서 헤어나기 힘든 것도 또 하나의 증상입니다. 알고 지은 죄가 있으면 회개한 후로도 오래도록 양심이 당신을 괴롭힙니다. 회개가 아주 깊었는지 자신할 수 없기에 계속 자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확신이 없다는 가장 확실한 증상은 메마른 기도 생활일 것입니다. 형들은 기도에 열심을 낼 수는 있으나 그들이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에는 경이로움이나 경외심이나 친밀함이나 즐거움이 없습니다. 형들은 기도 시간을 꾸준히 지키는 데는 훈련되어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기도는 필요한 것을 늘어놓는 간구가 거의 전부입니다. 기쁨에 겨워 저절로 터져 나오는 찬양은 없습니다. 사실 많은 형 부류 사람들이 그토록 종교적이라지만 사적인 기도 생활은 거의 없습니다. 삶에 문제가 터지면 혹 기도에 악착같이 매달릴지 모르나 그나마 상황이 호전되면 끝입니다. 이로 보건대 그들이 기도하는 주된 목표는 자신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환경을 통제하기 위해서입니다.

 

3. 전환

예수님은 잃어버린 형의 상태도 그 동생의 상태 못지않게 잘못되고 해로운 것임을 드러내십니다. 그 사실을 아는 게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예수님은 주로 바리새인을 겨냥해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실상을 보여 주고 변화를 촉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동생은 자신이 아버지와 멀어져 있음을 알았으나 형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형의 잃어버려진 상태는 매우 위험합니다. 형들은 하나님께 가서 자신의 상태를 치유해 달라고 구할 일이 없습니다. 자신의 상태에서 아무런 문제도 보지 못하기 때문인데, 이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병이 있음을 아는 사람은 의사에게 갈 수 있으나, 병이 있음을 모르면 의사에게 가지 않고 있다가 위험한 상태에 이릅니다. 비유 속의 형의 태도를 보면 애초에 동생이 집을 나가고자 한 이유 하나를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의 종류를 막론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이 신앙을 버리는 이유는 주요 종교마다 형들이 득실거리는 게 뻔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얼씬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종교야말로 세상의 불행과 갈등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형 부류의 사람들의 분노와 우월감은 모두 정서 불안과 두려움과 내적 공허감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책감과 두려움에 찌든 영적 시각장애인을 대거 양산할 수 있습니다. 이는 사회적 불의, 전쟁, 폭력 등의 큰 원인입니다. 종교에 등을 돌린 사람들은 대개 기독교도 하등 다른 바 없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형들이 넘쳐나는 교회에 가보았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도 또 하나의 종교일 뿐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말이 틀렸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우리를 불러 동생의 방탕한 삶에서 벗어나게 함은 누구나 아는 바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이 형의 도덕주의도 단죄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4. 대단원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세상의 주요 문제 중 하나인 종교를 해체하시면서 복음, 즉 진정한 기독교는 종교와는 전혀 다르다. 그 가능성에 부디 너희 마음을 열겠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덕주의와 종교의 병폐에 빠지지 않고도 하나님을 알 길이 있다는 희망 말입니다. 물론 복음을 믿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이 비유 속 형과는 크게 다릅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면서 형의 모습에 가까운 사람도 많습니다. 당신이 동생 부류의 사람이었다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중독이나 기타 동생의 죄에 일부나마 다시 빠질 위험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형이었다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그보다 더 쉽게 형의 태도와 형의 무감각한 영적 상태로 회귀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다시 교만, 정죄, 염려, 정서 불안, 기쁨 없음, 분노 등에 쉽게 지배당하게 될 것입니다. 형 부류의 사람들은 삶의 상황에 대해 속에서 분노가 들끓고 쓰라린 원한이 오래가고, 인종이나 종교나 생활방식이 다른 이들을 얕보고, 기쁨 없이 고역에 시달리듯 살아가며, 기도 생활에 친밀함과 기쁨이 별로 없습니다. 또 정서 불안이 심해 남의 비판과 거부에 대해서는 과민하지만 남을 정죄할 때는 가차 없고 냉혹합니다. 얼마나 비참한 모습입니까? 그렇다고 반항하는 동생의 길이 더 낫다는 건 물론 아닙니다. 자신의 도덕적인 노력 때문에 하나님이 구원해 주실 것으로 생각하는 종교적인 사람들도 대부분 이 형만큼 매정하고 분노에 차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님이 과장하신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의 설명인즉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극단으로 치닫지는 않지만, 이 두 가지 인생관 모두에 자체적으로 파멸의 씨앗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세상에 존재하는 두 가지 영적인 길을 생생히 그려 내십니다. 분명히 그분은 우리가 완전히 다르게 접근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그것을 어디서 찾을까요? 그 답을 찾으려면 예수 님이 이 비유에 일부러 빼놓으신 인물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분이 그렇게 하신 목적은 우리가 그 인물을 찾고 만나서 결국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 인물은 형님이어야 합니다. 다음 주에 우리의 참 형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설교에 대한 이론 > 네러티브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에 다니는데도 왜 불의한가?  (0) 2023.06.18
탕부 하나님 4  (0) 2023.03.20
탕 부 하나님 2  (0) 2023.03.05
탕부 하나님 1  (1) 2023.02.26
그리스도의 충족성  (2) 2023.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