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에 대한 이론/네러티브 설교

교회에 다니는데도 왜 불의한가?

wordlove 2023. 6. 18. 15:26

1. 본문: 10:43-35

2. 명제: 기독교 가르침에는 스스로를 자정 할 수 있는 장치가 있다.

3: 제목: 교회에 다니는데도 왜 불의한가?

 

갈등

고 팀 켈러 목사님의 글을 편집하여 올립니다. 시카고대학의 마크 릴라 교수는 <뉴욕타임스 매거진>에 기고한 글에서 십 대 때 '거듭나는' 체험을 했었노라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대학에 다니면서 '역 회심하고 기독교 신앙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디트로이트를 떠나 미시간주 앤 아버 (Ann Arbor)로 이사하면서 릴라는 어느 기독교 공동체에 들어갔습니다. 영적으로 살아 있다는 평판이 온 나라에 퍼져 있는 곳이었지만, 갈수록 '참담한 실망'뿐이었습니다. 더없이 권위적이고 위계질서가 엄격했습니다. 교인들은 하나같이 독선적이었고 교리적인 줄 세우기에만 열을 올렸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사람들의 삶을 조종하려 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성경, 그게 신앙의 세계에서는 엉터리라는 생각이 마음 깊이 자리 잡았다. 기독교에서 빠져나오는 첫걸음이었다."라고 썼습니다. 만약 독실한 신앙을 가졌으며 시민의식과 너그러운 마음가짐을 가진 교회들을 보아 왔다면 기독교를 훨씬 타당하게 여길 지성적인 토양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이와 달리, 허울뿐인 크리스천이나 독선적인 광신도를 상대한 경험이 훨씬 더 많다면 기독교 신앙에 타당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는 철석같은 확신을 품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엉터리"라는 마크 릴라의 판단은 철학적인 성찰을 통해 걸러진 순수한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내세우는 어느 특정한 인간이 자신을 휘두르려는 방식에 저항했을 따름입니다. 따라서 적잖은 이들에게는 크리스천의 행동이, 기독교 신앙에 대한 신뢰성을 갉아먹는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에 불신을 주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면 우선, 한눈에 들어올 만큼 선명한 크리스천의 성격적인 결함과 종교의 폭력, 그리고 광신적인 신앙일 것입니다.

 

2. 갈등 심화

세 가지 중 교인들의 성격적인 결함을 살펴보겠습니다. 교회 생활을 시작한 이들은 얼마 가지 않아 어김없이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보통 크리스천들의 성품에 수많은 결함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의 도덕적인 타락상은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현실입니다. 교회를 이끌어 가는 리더들은 대체로 세상의 지도자들만큼이나 부패한 듯합니다. 반면에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지만, 윤리적으로 본보기가 될 만한 삶을 사는 이들도 숱합니다. 기독교 신학은 흔히 '일반은총'이라고 부르는 것을 끊임없이 강조해 왔습니다. 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선하고 슬기로우며 정의롭고 아름다운 일은 누가 하든 하나같이 하나님이 그럴 힘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지혜와 재주, 아름다움과 솜씨 같은 근사한 선물들을 '은혜로', 다시 말해 우리 공로와는 아무 상관 없이 베풀어 주십니다. 신앙적인 확신, 인종, 성별, 또는 세상을 풍요롭고 밝게 하거나 지키는 데 이바지하는지와 상관없이 모든 인류에게 무차별적으로 허락하신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참다운 크리스천들이 지닌 성격 결함에 대해서도 빠짐없이 지적합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에 기대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게 성경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도덕적인 노력은 구원의 자격이 되기에는 너무 미미하며 그릇된 동기일 뿐입니다. 예수는 죽음과 부활을 통해 구원을 베풀었고 인간은 아무런 대가 없이 선물로 그 구원을 받는 게 전부입니다. 교회는 어떤 형태로든 이러한 사실을 믿습니다. 성품이 성숙해지고 행동이 변하는 것은 크리스천이 된 뒤에 차츰차츰 일어나는 성화 구원의 과정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갈 자격을 갖추려면 반드시 깨끗해져야 한다는 그릇된 믿음은 기독교 신앙과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아쉬운 노릇이긴 하지만, 이는 정서적으로, 윤리적으로, 영적으로 아직 갈 길이 먼 미숙하고 연약한 인간들이 교회에 가득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흔히 하는 말마따나, 교회는 성자들을 늘어놓은 박물관이 아니라 죄인들을 치료하는 병원이다." 훌륭한 성품은 주로 사랑이 넘치며 안전하고 안정된 가정과 사회 환경에서 비롯됩니다. 하지만 불안정한 가정 여건, 형편없는 본보기, 그리고 비참하고 실망스러운 역사를 지닌 이들이 허다한 게 현실입니다. 이들은 결국 깊은 불안과 과민, 자신감 결핍, 통제할 수 없는 분노, 수치감, 중독을 포함해 온갖 어려운 문제들과 씨름할 수도 있습니다. , 이제 다치고 깨진 과거를 지닌 누군가가 크리스천이 되고 성품도 예전보다 한결 나아졌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도 심리적으로 안정돼서 신앙적인 소속감이 특별히 필요하지 않은 이보다는 안정감과 자기 절제가 부족할 수 있습니다. 더 고단한 삶을 살면서 '삶의 표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이들 쪽에서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독교 신앙으로 돌아오는 일이 더 자주 일어날 개연성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의 삶이 신앙이 없는 이들에 비해 더 나을 만한 구석이 없다고 보는 게 당연합니다. 박물관을 찾는 이들보다 병원을 들락거리는 이들의 건강이 비교적 더 나쁘리라고 판단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3. 전환

그렇다고 한다면, 선지자들과 예수님은 무엇을 가르치고 비판하고 있습니까? 기도와 금식, 삶의 방향을 둘러싼 성경의 가르침들을 겨냥하는 게 아닙니다. 문제는 영적이고 윤리적인 규범을 따르는 행위를 다른 이들과 하나님을 움직이는 도구로 삼으려는 신앙인들의 성향입니다. 이들은 종교의식과 선행으로 하나님을 달래 가며 영향력을 행사하려 듭니다. 결국, 겉으로 드러나는 신앙 형식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에서도 탐욕과 물질주의, 억압이 작용하게 됩니다. 수준 높은 헌신과 윤리적인 선행으로 하나님을 흡족하게 하고 있노라고 자부하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영향력을 행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선지자들의 하나님은 오로지 은혜로 구원을 베푸실 따름입니다.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행위에 좌우되는 분이 아닙니다. 순전히 은혜로 구원을 얻은 이들은 감격에 겨워 기꺼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종이 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10:43-35"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과 선지자들의 비판을 살펴보면, 독선적인 신앙에는 늘 사회문제에 무감각한 증상이 특징적으로 나타나지만, 참다운 신앙에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향한 절절한 관심이 어김없이 등장합니다. 종교 개혁자 장 칼뱅은 예언서에 주석을 붙이면서, 하나님이 가난한 이들에게 느끼는 일체감은 여간 깊은 게 아니어서 그들의 울부짖음은 주님의 고통을 벗어낸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가난한 이들을 대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대접하는 행동이라고 가르칩니다. 교회가 더러 인간을 억압하는 주체 노릇을 해 왔다는 데는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성경은 종교적으로 불의를 뒷받침하는 행태를 분석하고 과감하게 비판하는 도구가 되어 왔음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역사학자 존 서머빌은 기독교 신앙을 꼬집는 세간의 강력한 비평가들조차도 사실상 성경 안에서 얻어 낸 원리들을 써서 기독교를 고발한다고 지적합니다. 교회는 권력에 굶주렸으며 자기중심적이라고 비판하는 이들이 많지만, 권력과 존경을 추구하는 것을 선하게 여기는 문화도 허다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교회의 죄를 분별하는 기준이 될 만한 덕성의 목록을 어디서 구하겠느냐고 묻습니다. 기독교 신앙 그 자체에서 얻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이런 사실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서머빌은 사고 실험을 제안합니다. 앵글로색슨족을 비롯해 기독교가 들어가기 전의 북유럽 부족들은 명예 개념에 토대를 둔 사회를 이루고 살았습니다. 다른 이들의 존경을 얻고 지켜 내는 일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수치심 기반의 문화였습니다. 그들을 개종시키려 애썼던 수도사들은 그와 달리 남들이 더없이 잘되기를 바라는 자비에 바탕을 둔 가치관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서머빌은 둘 사이의 차이를 살펴보자는 뜻에서 학생들에게 몸집이 자그마한 할머니가 한밤중에 큼지막한 지갑을 들고 길을 간다고 상상해 보도록 했습니다. 노인을 때려눕히고 지갑과 돈을 빼앗아 달아나지 않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약자를 괴롭히면 비열한 인간이 되므로 가방을 강탈하지 않는다는 것이 명예 수치 문화의 답변이었습니다. 다른 이들의 존경은 물론이고 자신도 자신을 존중할 수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이런 윤리는 두말할 필요 없이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런 행동이 자신의 명예와 평판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아야 할 또 다른 사고 훈련이 있습니다. 강탈을 당한다는 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며 할머니가 돈을 잃어버릴 경우, 거기에 기대어 살아가야 할 식구들은 얼마나 어려움을 겪을지 가늠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인과 그 가족이 가장 행복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돈을 빼앗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타인 중심의 윤리입니다. 온전히 할머니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 해에 걸쳐 실험을 거듭한 결과, 절대다수의 학생들이 두 번째, 다시 말해 타인 중심적인 윤리를 좇아 판단을 내렸습니다. 서머빌은 역사가로서 크리스천이 어떤 도덕적인 지향점을 가졌는지 보여 줍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처럼 사람됨보다 자존심을, 섬김보다 지배를, 화평을 이루기보다 용기를, 겸손보다 영예를, 모두를 동등하게 존중하는 태도보다 소속된 부족에 충성하는 마음가짐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명예에 토대를 둔 문화를 완전히 바꿔 놓았습니다.' 교회의 억압과 불의를 비판하는 세상 사람들의 전형적인 논리들은 사실상 기독교가 자신을 향해 지적하는 말씀의 원리들을 발판으로 삼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보여 준 결점들은 복음의 원리들을 불완전하게 적용하고 실천하는 데서 비롯한 사태로 볼 수 있습니다. 서머빌에 따르면, 복음의 메시지를 처음 들은 앵글로색슨족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힘을 두려워하고 존중하지 않는 사회가 어떻게 생존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회심한 뒤에도 복음으로 완전히 변화 된 것은 아닙니다. 타인 중심의 기독교 윤리를 부족이 대대로 유지해 온 방식들과 뒤섞는 성향이 두드러졌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의 영예를 지키는 방편으로 십자군을 지원했습니다. 수도승과 여성, 농노들에게는 너그러운 덕성을 기르라고 주문하면서도 명예와 전투를 생각해야 할 사나이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태도로 치부했습니다. 범죄로 규정 받아야 마땅한 일들이 교회사에 차고 넘치는 건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제시한 말씀의 원리들 자체를 포기한다면 그 비판의 근거마저 잃어버리는 처지에 몰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향한 대단히 정당하고 지독한 비판에 어떻게 반응할 것입니까? 기독교 신앙을 버리는 것은 답이 될 수 없습니다. 표준도, 바로잡을 근거도 없애 버리는 꼴이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더 완전히, 더 깊게 붙드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성경은 자체적으로 신앙을 남용하는 일들이 벌어질 것이며 거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누누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크리스천의 역사에는 자정 능력을 보여 주는 놀라운 사례들이 무수히 남아 있습니다.

 

4. 대단원

예수의 이름으로 정의를 실현한 한 사례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기독교 역사에 가장 깊게 박힌 오점은 아프리카 노예무역입니다. 당시 노예를 사고팔았던 나라마다 기독교가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당대에 벌어진 일들에 대해 교회는 그 사회와 함께 공동 책임을 져야 합니다. 노예제도는 오랜 세월 동안 형태를 달리해 가며 인류 문화 전반에 사실상 보편적 이리만치 두루 퍼져 있던 제도였습니다. 그런데도 그게 잘못이라는 결론을 처음 내린 이들 역시 크리스천들이었습니다. 사회사가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웬만하면 부정하고 싶어서 하지만, 로마 제국이 망하자마자 크리스천의 신학에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교리가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기독교화된 유럽에서는 주변부만 남기고 노예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유럽인들은 신세계에 노예제도를 도입하면서 교황의 완강한 반대에 부닥쳤습니다. 이는 역사에서 편리하게 '실종되었던' 사실입니다. 결국, 신세계의 노예제 폐지는 크리스천 활동가들의 손에서 시작되고 또 성취되었습니다. 크리스천들이 노예제 폐지 운동에 나선 동기는 통상적인 인권 이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고용계약을 맺고 종이 되는 과거의 방식이나 성경 시대의 종살이 모두 인간에게 혹독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인종을 근거로 삼으며, 납치에서 비롯되고 평생 누군가의 소유물이 되는 노예제도가 신구약을 통틀어 어느 쪽 가르침에도 들어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영국의 윌리엄 윌버포스와 미국의 존 울면(John Woolman)을 포함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크리스천 활동가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일에 삶을 송두리째 바쳤습니다. 노예무역은 엄청나게 수익성이 좋았으므로 교회 내부에도 이를 합리화하고자 하는 강력한 흐름이 존재했습니다. 숱한 교회 지도자들이 노예제도를 옹호하고 나섰습니다. 자정을 위한 싸움은 그야말로 거대했습니다. 노예제 폐지론자들의 압력에 못 이겨 영국 사회가 대영제국에서 노예제를 완전히 없애 버리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을 즈음, 식민지 개척자들은 노예를 해방하자면 어마어마한 자금이 투입될 수밖에 없고 생활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을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하원의 폐지론자들은 거기에 굴복하지 않았으며 노예를 해방하는 대가로 개척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는 데 합의했습니다. 영국 정부 연간 예산의 절반에 이를 만큼 어마어마한 액수였습니다. 1833, 마침내 노예해방법안이 의회를 통과했습니다. 소요 예산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수준이었는지, 어느 역사가는 영국의 노예제 폐지를 '자발적인 경제 자살'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로드니 스타크는 노예제도를 끝장내기 위해 폐지론자들이 어떻게 그처럼 엄청난 희생을 감수할 수 있었는지 규명하느라 사학자들이야말로 안간힘을 쓰고 있음을 전하면서 역사가 하워드 템펄리(HowardTemperley)의 견해를 소개합니다. 그는 정치적인 행위란 하나같이 자기중심적이게 마련이라는 게 학계의 통설이므로 노예제 폐지의 역사는 그야말로 수수께끼라고 말합니다. 수백 명을 헤아리는 연구자들이 그 까닭을 풀이할 방도를 찾아왔음에도 "노예무역을 종식하기 위한 활동을 펼쳤던 이들이 이렇다 할 이득을 보았다든지, 아니면 그러한 조처들이 국가에 경제적으로 막대한 부담을 주는 데 그쳤는지를 그 누구도 속 시원히 보여 주지 못했다" 것입니다. 노예제도는 성경에 근거해 볼 때 잘못이기에 폐지되었고 그 얘기를 앞장서 부르짖은 이는 바로 크리스천들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는 이처럼 자정 장치들이 존재해 왔습니다. 신앙이 불의한 행위들을 뒷받침할 때마다 스스로 비판의 목소리를 내왔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불의를 저지른다는 건 곧 스스로 불의의 희생자가 되어 죽으시고 원수를 용서하라고 명령하신 분의 영에 진실하게 반응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 목숨을 버려 남들을 자유롭게 하는 이들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와 디트리히 본회퍼를 비롯해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한 목소리로 부르짖는 참다운 기독교 신앙을 실현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설교에 대한 이론 > 네러티브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탕부 하나님 4  (0) 2023.03.20
탕부 하나님 3  (2) 2023.03.12
탕 부 하나님 2  (0) 2023.03.05
탕부 하나님 1  (1) 2023.02.26
그리스도의 충족성  (2) 2023.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