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에 대한 이론/성경적 설교 작성법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

wordlove 2023. 6. 4. 14:52

1. 본문: 요일 4:12

2. 본문 요약: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3. 주제: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

4. 테마: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근거

5. 명제: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랑이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이 명백하다. 선언적 명제

6. 목적: 하나님을 본 자가 없지만, 하나님을 아는 방법이 있음을 소개하기 위해서

7. 질문제기: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8. 전환 문장: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랑이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이 명백하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가하시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9. 대지

10. 제목: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제기되는 가장 큰 물음입니다. 12" 사랑하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오늘 말씀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랑이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이 명백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랑이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이 명백하다는 사실을 증거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먼저, 부정적 의미로 우리는 직접적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2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우리가 제거해야 할 첫 번째 사항은 직접적 앎이 가능하다는 생각입니다. 1:18 절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바울은 딤전 6:16절에서"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이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이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신약성경보다 구약성경이 더 분명한 조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현현'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특정한 사람에게 나타나심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아브라함과 롯에게 나타나신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이 사람들은 보긴 했지만 하나님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주의 천사'에 관해 말하며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건이 성육신 이전의 예수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과 관련된 것이라는데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분은 특정하고 구체적인 목적을 위해 인간의 형체를 입고 일시적으로 나타나셨으며, 따라서 우리는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여전히 말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가장 흥미로운 예는 모세의 경우에 일어난 일일 것입니다. 어느 특별한 때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네 앞을 지날 것이며 네게 나타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또 하신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가 자신의 등만 보도록 허락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는 말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모습이 나타난 것은 분명합니다. 19:19-23절에 하나님이 지나가셨으며, 모세는 그분의 등을 보았습니다. 이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특이한 장면 중 하나이지만 우리가 매우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상황임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라는 성경 말씀을 뒷받침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님이 빌립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사용하신 말씀도 같은 내용을 다른 방식으로 언급하신 것입니다. 결국, 그는 "우리에게 아버지의 모습을 분명히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비록 주님이 우리를 떠나시더라도 안심하고 살아갈 것입니다."라고 말한 셈입니다. 14:9에서 주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그분 말씀인즉 이러했습니다. “네가 아버지를 육안으로 직접 보았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나를 보라. 그리하면 너는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개념을 파악할 것이다.” 그리스도 그분이 아버지신가? 아닙니다. 그분은 아들이십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들 안에 계시고 아들은 아버지 안에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버지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들을 보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우리는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하는 이 기본 개념을 여전히 견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 보고자 애쓰도록 만들려는 모든 교훈에서 과감하게 등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상 즉 직접 계시를 절대 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궁극적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그것이 궁극적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직접 뵐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여기 이 땅에 그리고 이 세상의 순례 여정 가운데 있는 동안 우리는 그것을 바라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직접 귀에 들리는 음성을 듣기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일을 추구하며 이상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신비주의자들도 많았습니다. 초대 교회 시대에는 신비 종교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신비 종교들과 위대한 철학들이 특이하게 혼합된 형태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이라는 개념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고후 5:7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한 바울이 묘사하는 것과 같은 삶을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보고 듣기를 원했으며, 유형적인 그 무엇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했고 특정한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들은 적절한 음악을 듣는가 하면 다른 예술을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것을 보기 위해 온갖 수단이 다 동원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정신 이상과 이단 그리고 환각의 희생물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도덕적 삶은 타락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해 오늘날 여러분은 직접 보고 듣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점을 보게 됩니다. 요한은 이 사람들에게 경고하는데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거하심에 대한 확신을 이상이나 들을 수 있는 음성 위에 기초를 두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랑이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이 명백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둘째,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으로 계시하시며 서로 사랑하는 우리 안에 계십니다. 9-11절에서 요한은 그 물음에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모든 일 가운데서 이를 드러내셨다는 점에서 그분이 사랑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내게는 이상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은혜 안에서 내게 이상을 주실 수도 있지만 나는 그것을 찾지도 갈망하지도 않습니다. 왜인가요?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역사 속에서 구체적이고 확실한 그 무엇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거기서 자신을 사랑으로 나타내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거하심에 대한 나의 확신과 확실성의 두 번째 근거가 바로 그것입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되 그렇다면 의혹에 사로잡혀 과연 하나님이 계시느냐는 의문 속에서 완전히 절망에 빠집니까? 요한은 그렇지 않다.” 말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이제 나는 두려움과 외경의 심정으로 이 같은 주제에 접근합니다. 신자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간의 이처럼 친밀한 연합과 그분들이 우리 안에 거주하심에 관한 요한복음 14장의 위대한 진술을 상고해 봅시다. 우리는 요한복음 14, 15, 16, 17장에서 우리는 똑같은 내용의 말씀을 다시 접합니다. 12"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요한은 계속해 말했습니다. 13"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 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이 부분에서 우리는 모세처럼 신발을 벗습니다. 우리는 영광스럽고 장엄한 그 무엇을 접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을 다룰 때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1세기에 살았던 어떤 사람들을 논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랑이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요? 내가 생각하기에 이 시점에서 요청되는 것은 우리가 그 개념을 물질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영이심을 시사하는 성경의 다른 근본적 가정을 기억한다면 그러한 위험을 피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물질적 개념에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으로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예화를 들면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소위 영혼이 있습니다. 영혼이 무엇인가요? 어느 유명한 의사가 한번은 인체를 여러 번 해부해 보았지만 '영혼'이라고 묘사되는 기관은 결코 찾을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는 영혼의 영적 정의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영혼은 비물질적이며 물체가 아니고 어떤 기관도 아닙니다. 인간의 몸을 해부하는 사람이 인체에서 그것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영혼은 영적 실체 영적 특질을 지닌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내 영혼이 내 속에 있고 장차 내 영혼이 내 육체를 떠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소위 영혼이라 부르는 것이 우리 몸에 있는 것과 같이, 성경에는 영이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거처로 삼으시고 우리 안에 사십니다. 이는 영원하신 하나님이 특이한 의미에서 내 안에 거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신기한 방식으로 하나님, 곧 영이신 영원한 하나님이 내 삶 가운데로 들어오사 내 삶을 움직이고 인도하고 체계화시키며 자신을 내 삶 가운데서 드러내신다는 뜻입니다. 이는 우리가 육체 안에 거하는 한 그리고 이 세상과 이생의 삶을 사는 동안은 결코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할 그 무엇입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성육신의 모든 신비와 비교될 수 있습니다. 한 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영원하신 아들이시지만 동시에 목수인 인간 예수이십니다. 여러분은 그와 같은 일을 이해할 수 없지만, 성경에는 그러한 언급이 있습니다. 영원하신 아들이 아버지의 품에서 나오사 나사렛 예수로 성육신 하셨습니다.. 영원하신 아들이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사 인간으로 거하셨으며, 하나님도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도 그분 안에 거합니다. 사도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직접 이상을 추구하지 말라. 직접 들을 수 있는 음성을 갈망하지 말라. 미신적 공포심을 예감하게 하는 어떤 것에 몰두하지 말라.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에게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그 무엇이 있다. 사랑의 하나님이 너희 안에 거하신다. 너희가 형제를 사랑한다면, 확실하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여기에 있다." 그것 이렇게 설명해 봅시다. 내가 형제를 사랑한다면 나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이런 식으로 표현합니다. 내가 형제들을 사랑하고 또 그들을 사랑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하나님이 계시며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입증하는 증거입니다.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서는 형제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본성상 사랑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요한이 3장에서 그 점을 어떻게 상술했는지 기억할 것입니다. 거기서 그는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가인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었으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하면 그것은 세상이 으레 하는 일이며, 우리 모두의 본성이 그러합니다.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면, 나를 위하고 악의적으로 대해 온 어떤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자신을 발견하면, 나를 해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한 어떤 사람을 돕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 나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며 그분이 내 속에 계심을 알고 있는 셈입니다. 그분이 내 안에 계시지 않다면 내가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본성상 이렇게 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형제를 사랑한다면 나는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확신하는 셈입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여기에 그 답이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나는 이상을 보지 못하고 음성을 직접 듣지 못하며,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심에 대한 어떤 물질적 증거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 안에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내가 하는 일을 결코 할 수 없습니다. 요한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고 말했습니다. 그 얼마나 영광스러운 말입니까? 그 의미는 이러합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사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가 되게 하고 또 그 모든 일을 이루게 하신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이 우리로 형제를 사랑하고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너무도 영광스럽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사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은 단지 그분이 여러분과 내게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함일 뿐만이 아닙니다. 물론 그 점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첫 번째 사항입니다. 그것 없이는 우리가 잃어버린 바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닙니다. 끝은 이러합니다. 달리 말해 사람들이 자신의 처한 실제적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형제를 사랑한다면, 인간의 영혼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거기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그렇게 대하심으로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이 모든 사실은 주님이 직접 산상수훈에서 그토록 완벽하게 설명하신 바입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 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결국, 주님 이렇게 말씀하신 셈입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면 무슨 영예와 상이 있겠느냐? 이방인도 그렇게 한다. 너희는 내가 어떤 사랑에 대해 말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여러분 그런 식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듯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분은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시며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서 완전해지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시듯이 완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의 거룩한 목적을 나타내고 드러내는 셈입니다. 그분은 인종, 그분 자신을 닮은 인류,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고 계십니다. 이들은 이와 같은 높이와 수준에 이를 수 있는 자들이며, 하나님이 사랑하시듯이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확신, 하나님과의 친교 및 관계의 확실성을 갖는 것도 서로 사랑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을 확신하며 아는 첫 번째 방법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요,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형제를 사랑하고 있으면 나는 하나님이 분명 내 안에 계심을 압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가 형제를 사랑하면 나는 하나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사 내 죄를 위한 화목제로 삼으신 궁극적이고 영원한 목적을 드러내고 있는 셈입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교리입니까? 가시적이고 유형의 표적들을 구하기를 중단합시다. 그리고 놀랍게도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하는 이 단순하지만 심오한 교훈을 믿읍시다. 이 진리를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써 온 세상에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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