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에 대한 이론/그리스도 중심적인 강해 설교

두려움에서 벗어남

wordlove 2023. 8. 20. 15:41

1. 본문: 요일 4:18

2. 본문 요약: 사랑이 있는 곳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것은 벌을 받을지 모른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은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3. 주제: 두려움

4. 테마: 두려움을 벗어나는 길

5. 명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사역을 통해 얻은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벗어나게 할 수 있다. 가능성의 명제

6. 목적: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신 완전한 사랑을 믿음으로 완성하도록 돕기 위해서

7. 질문제기: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이며 어떻게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요?

8. 전환 문장: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사역을 통해 얻은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벗어나게 할 수 있다.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이며 어떻게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요?

10. 제목: 두려움에서 벗어남

 

모든 성경의 가르침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죄의 결과에 따라 우리의 모습이 그러하기 때문에 긍정적 설명만으로는 부족하고 부정적 어투의 설명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여기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18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이는 징벌과 관련된 말씀이며 징벌이란 항상 우리를 두려워하며 불행하게 하는 경향이 있는 무엇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기독교 삶이 어떠하며 하나님의 목전에 선 우리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발견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적용할 수 있는 시험 방법 중 심판의 날이라는 이 위대한 사실의 조명 아래 자신을 점검해 보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요한은 여러분이 현재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아는 것은 심판 날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할 때 어떤 느낌을 받는지 시험해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하나님과 형제들 서로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시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그 위대한 날을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요한이 18절에서 강조하는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사역을 통해 얻은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벗어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신 예수님의 완전한 사랑을 내 삶에서 믿음으로 완성하도록 돕기 위해서 이 말씀을 전하기를 원합니다. 인생이 두려움하는 이유가 무엇이며, 어떻게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요?

 

첫 번째로 자연인은 본성상 심판의 날을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그날에 대한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다. 심판의 날이 두렵지 않으며 그것을 두려워한 적이 결코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단지 원시적 미신의 유품으로, 성경 교훈 중 오래전에 버렸어야 하는 것으로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개념과 전적으로 배치되는 그 무엇으로 간주합니다. 사실 심판 날과 관련된 조롱과 풍자는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예 심판의 날에 대한 생각을 도무지 갖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무지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심판 날에 관해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의 궁극적 운명은 어떻게 될까?" 하고 자문하기 위해 잠시 멈출 생각을 결코 하지 않습니다. 그는 심판의 날이 있다고 자각한 적이 결코 없기 때문에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거기에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지성적이며 자기 속에 양심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지성인은 심판의 날에 대한 두려움에 관해 무엇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공포입니다. 셰익스피어는 이를 가리켜 우리의 '출구'라고 지칭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하나님과 심판에 대한 이와 같은 두려움, 영원에 대한 두려움, 그 모든 것의 불확실함에 대한 두려움에 관해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지성적인 사람이라면 심판의 난에 대한 이런 두려움에 대해 무엇인가를 필히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성경은 히 19:27"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 공의, 거룩하심, 하나님의 의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나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그래서 그것을 대충 얼버무리고 맙니다. 어떤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유감스럽지만 그는 기독교 교회에서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과 교회의 다른 사람들 사이에 다툼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교회를 떠나 다른 도시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다른 교회에 출석했으며, 이제 임종을 맞고 있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싸웠던 사람들이 그의 병고 소식을 듣고 함께 만났습니다. 그들은 "우리도 많은 잘못을 했다. 그가 죽어가고 있다고 하니 찾아가 보자. 그렇게 하면 그에게 위로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의 아내가 침실로 올라가 그들이 왔다고 알려 주었지만 그는 그들을 보지 않으려 했습니다.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악수를 청하며 내게 오는 자를 용서하지 않고서 어떻게 내가 영원 가운데서 하나님을 뵐 수 있겠으며 나의 영원한 운명을 어떻게 맞이하겠습니까? 이는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다음과 같은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주인에게 빚을 졌고 그 주인은 그에게 응분의 징벌을 가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주인에게 가서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제게는 갚을 돈이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잘 알았다. 내가 모든 것을 용서해 주겠다"라고" 말했으며 그 사람은 밖으로 나갔습니다. 한편 그에게 얼마를 빚진 동료 한 명이 거기 있었습니다. 동료가 진 빚은 그 사람이 주인에게 진 빚과 비교하면 아주 적은 액수에 불과했습니다. 이 동료는 그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해 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내게는 갚을 돈이 없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나를 용서해 주세요" 그러나 그는 동료의 목을 잡고 너는 하나도 남김없이 내게 다 갚아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주인이 그 사람에게 했던 말을 기억합니까? 그 주인은 탕감해 주기 전의 상태로 다시 돌아가 그를 결박하여 옥에 가두라"고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는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말씀하셨습니다. 심판의 날이란 가장 놀랍고도 외경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심판의 날을 생각하면서 떨리지 않는다면, 그날을 맞이할 생각을 시작하기 바랍니다.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이며, 어떻게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요?

 

두 번째는 그리스도인은 심판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152:15를 읽어 보자. 거기서는 주님이 오신 중요한 목적들 중의 하나와 그분의 십자가 죽음을 당하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은 중요한 효력들 중의 하나는 "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사망의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 점을 납득시키기 위해 특별한 주장을 전개합니다. 그는 사랑과 두려움은 원칙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워하는 마음은 참된 사랑의 정신과 상반됩니다. 전염병에 걸린 어린아이를 간호하는 어머니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어머니가 아이로부터 질병이 전염될 가능성을 생각하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또한 주님이 보여 주신 본보기를 실례로 들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귀신을 쫓아내고 전도하기 위해 제자들을 파송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분명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들을 미워할 것이었지만 그분은 이렇게 조언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이런 두려움을 제거하는 방법은 어떤 의미에서 더 큰 두려움을 지니는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더 큰 것이 보다 작은 것을 몰아냅니다. 그것이 바로 첫 번째 주장입니다. 그러고 나서 요한은 계속해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이 온전해지는 자들이므로 두려워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이는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면 그것은 그들이 징벌을 두려워하고 사랑에 대한 그들의 개념에 무엇인가 부족함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랑과 두려움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들어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게는 두려워할 권리가 전혀 없습니다. 한편 히브리서에 언급된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이 주장과 귄면은 어떠합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외경심과 거룩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 속에는 참된 경외심이 있습니다. '경건함과 두려움'이란 이와 같은 형벌에 대한 두려움. 곧 비굴하게 떠는 공포심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온전한 사랑은 그러한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그러기에 자연인은 심판의 날을 두려워하며,,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끝으로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은 두려움에서 자유하게 될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일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4:9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 두려움을 제거하는 첫 번째 방법은 오직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개신교의 교부들이 그 점을 강조했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심판의 날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하기 위한 첫 번째 방법은 하나님이 우리 주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깨닫는 것입니다. 심판의 날에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 자신을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나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신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대적했고 그분의 율법을 범했으며 그분을 망각했습니다. 나는 온 마음과 정신과 영혼과 힘을 다하여 그분은 사랑하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그분의 백성과 나 자신에 대해 죄악을 범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거기에 설 수 있습니까? 내가 거기 담대히 설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곧 그분이 아들을 보내어 나무에 달리게 하사 내 죄를 대신 짊어지게 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숨는 것, 이 방법 외에는 그 점과 관련해 다른 아무것도 내게 평안을 줄 수 없습니다. 나는 선한 일을 많이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저지른 죄악을 생각한다면 나의 선행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길은 단 하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나는 그분 안에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늘의 거룩 성을 곰곰이 생각하자면, 내게는 다른 희망이 전혀 없습니다. 나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의 아들이 손수 지으신 의의 겉옷으로 나를 덮되 내 죄악과 죄악 된 삶을 덮으심으로 말미암아 나의 주님이자 구주 안에서 온전해진 모습으로 옷 입고 서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을 통한 칭의! 두 번째 사항은 내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 한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 내가 하나님을 닮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심판날에 담대하게 설 수 있는 두 번째 근거는 내가 심판의 날을 곰곰이 생각할 때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요한일서에서 찾은 여러 가지 시험 방법들을 적용한 결과, 나 자신이 무가치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더 알기를 원합니다. 나는 그분을 더욱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나는 형제를 사랑합니다. 나는 성경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기도를 좋아합니다. 자연인은 이런 것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녀임에 분명합니다. 그분은 내게 자신의 성품을 주셨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이럴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그분과 대면할 것을 곰곰이 생각하건데, 나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자녀를 거부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분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칭의에 맞붙어 나의 성화가 나를 도웁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주께서 그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법이 있음이라." 아직도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사랑 안에서 온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두 가지를 항상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내가 칭의와 성화를 항상 함께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릇된 길로 빠진 것입니다. 나는 도덕율 폐기론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의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면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렇게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는 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이 둘은 항상 함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고전 1:30“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신다.” 심판 날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하는 방법에는 즉각적인 것과 점차적인 것이 있습니다. 즉각적 혹은 직접적 방법은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라는 교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내가 전적으로 구제불능이고 절망적이며 죄악 됨을 느낄 때 해야 할 일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나는 오직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행하신 사역에만 의지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내 행위에 의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나를 비참하게 만든 원인입니다. 5: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 이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리십시다. 여러분은 안심해도 됩니다. 여러분은 오직 믿음에 의해 의로워집니다. 다른 한편도 기억하십시오. 간접적인 혹은 점차적인 방법이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지 않거나 사랑이 내 안에서 온전해지지 않는다면, 나는 끊임없이 정죄와 두려움에 시달린 것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의 모든 삶을 정죄 속에서 허비할 것입니다. 나의 모든 삶은 비참해질 것입니다. 나는 심판의 날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담대함을 갖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그 대답이 여기 있습니다. 사랑의 삶을 살라. 사랑이 여러분 안에서 온전해지게 하라 형제를 사랑하라. 그럴 때 여러분은 자신에게 나의 지금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나도 이 세상에서 그러함을 발견한다."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화는 간접적으로 점차적으로, 칭의와 함께 보조를 갖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온전해질 수 없을 것이지만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이 사랑을 나타낼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여전히 불완전할지라도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나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신 것이라고 깨달은 것이다. 그분의 우리를 온전하게 하실 것이며, 그리하여 결국에는 유 24"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것이다.” 자연인은 심판의 날을 두려워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심판의 날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그날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에 의해 의롭다 하심을 얻고, 그리스도에 의해 성화되어, 그리스도를 닮게 되며,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지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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