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요일 5:21
2; 명제: 영적 삶에서 가장 위험을 주는 것은 우상 숭배이다. 선언적 명제
3. 제목: 우상 숭배
오늘 본문은 요일서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본 서신의 수신자들의 삶과 장래를 너무도 염려했던 나이 많은 요한 사도의 마지막 권면입니다. 노인의 말은 항상 존중하고 생각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오랜 경험에 기초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위인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특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남긴 마지막 말은 가장 중요합니다. 요한 사도는 아마 90세 정도 된 노인으로 인생의 끝이 눈앞에 닥쳤음을 알고 있으며, 적대적인 세상에서 살아가는 성도를 바라보면서 그들이 승리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들이 충만한 기쁨을 갖기 원하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 ““ 요한은 항상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경고를 좋아하지 않으며, 우리 역시 본능적으로 그것을 싫어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지 말라는 말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항상 그런 말에서 모욕적인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오랜 경험을 통해 경고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 적그리스도들, 거짓 교사들, 거짓 교리들 등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매우 자주 언급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경고했습니다. 요한의 글은 경고들로 가득하며, 이 요일 역시 실제로 그러한 경고로 마감됩니다. 그는 매일의 삶을 살아가며 이 세상의 적대 세력들에 대항해 싸우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돕고자 했습니다. 그는 근사한 어투로 마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라고" 말한 것처럼 실천적입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경고의 말입니다. 세상과 이생의 삶에서 한 가지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7:3절"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은 그러한 지식이나 지각이 없다면 우리에게 직면된 영적 문제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며, 영적 전쟁에서 패배할 것이 분명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지식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을 알고 있다면 우리에게 영생이 있습니다. 요한은 이 점을 거듭해 상기시켜 왔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일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그분과 동행하는 것이며, 그분 안에 거하며, 그 지식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요한이 수신자들이 갖기를 그토록 갈망하는 바가 그것입니다. 요일 1:3절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이생과 세상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으려고 위협하는 것들이 항상 존재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본 서신 말미에서 제시하는 '악한 자'에 관한 언급이 그것입니다. 악한 자의 최고 목표는 우리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즉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본 서신을 마감하면서 끔찍한 위험에 대해 경고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영적 삶에서 가장 위험을 주는 것은 우상 숭배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상 숭배에 대한 세 가지 특별한 측면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영적 삶을 훼방하는 가장 큰 적이 바로 우상 숭배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직면하는 가장 큰 위험은 행위나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우상 숭배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행위와 행동은 항상 우리의 태도와 생각에 따른 결과입니다. 어떤 사람이 생각하는 바가 바로 그의 존재입니다. 행위란 항상 어떤 생각 즉 관점의 표현이며, 행위를 통해 그 사람의 됨됨이가 드러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사항은 생각, 관점, 철학, 믿음 등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근본적 잘못은 614개에 달하는 율법의 세부사항들에 전문적 식견을 발휘해 너무도 관심을 기울인 나머지 율법의 위대한 정신들을 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한때 주께 나아가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하고 여쭈었을 때, 그런 잘못을 범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막 12:29-31절"첫째는 이것이니...... 네너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만일 이 율법 정신이 선행되면 우리의 행위와 행동이 저절로 조심스러워질 것입니다. 우상숭배가 무엇입니까? 우상에 대해 간단히 정의를 내리면 이러합니다. 우상이란 우리 삶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차지하셔야 하는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나의 삶과 헌신을 사로잡는 모든 것, 내 삶에서 중심이 되는 모든 것, 중요한 듯이 간주되는 모든 것, 내게 필수적인 모든 것입니다. 우상이란 내가 의지하며 살아가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나를 움직이고 고무시키며 매료시키고 자극하는 것은 무엇이나 우상입니다. 우상이란 내가 섬기며 대부분의 시간과 관심과 정력과 재물을 바치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내 삶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무엇이나 우상입니다. 우상 숭배는 로마 가톨릭에서 참된 교리로 간주하는 동정녀 마리아 숭배, 성인 숭배 및 그들에게 올리는 기도 등의 형태를 취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우상 숭배의 한 형태입니다. 하나님께만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성삼위 하나님만이 경배를 받으셔야 합니다. 그분은 유일하게 참되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며, 삼위의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누구도 우리의 신앙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 한계를 넘어 누군가에게 헌신한다면 그것은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자신의 종교를 섬기는 일도 가능합니다. 이런 우상 숭배는 그 얼마나 교묘합니까?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단지 자신의 종교적 의무 이행과 자기 나름대로의 믿음을 섬길 수 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영성체에 참여하는 것과 같이 특별한 방식의 특별한 의식을 강조하는 가톨릭의 모든 종교 형태에서 나타나는 오류입니다. 그것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라기보다 이와 같은 의무 이행입니다. 우상 숭배는 가톨릭적 형태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복음주의 진영 가운데서도 발견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종교뿐만 아니라 교회, 종교 단체, 특별한 공동체, 특별한 교파 혹은 자신의 특별한 관점을 섬길 수도 있습니다. 이들 모두 섬김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신학이 우상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개념을 섬길 뿐 하나님을 섬기지 않습니다. 그 얼마나 끔찍스러운 일입니까?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잊고서 그분과 관련된 개념과 이론, 교훈에만 머무르고 있기가 너무도 쉽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속죄의 교리 자체에만 머무를 뿐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분이 당하신 고난과 그분의 복되신 인격을 망각하기란 너무도 쉽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모두 우상숭배입니다. 또한 자신의 경험을 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자신과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에 관해 말합니다. 그들이 항상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하나님이라기보다 자아입니다. 더 나아가 어떤 이들의 경우에는 자신의 조국이 우상입니다.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자기 조국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런 과오를 범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국가의 힘과 그것이 자신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을 섬깁니다. 그들은 그것을 위해 삽니다. 그것은 그들의 우상이요 신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우상으로 섬기기 쉽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우상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우상으로 섬길 수 있으며, 그들 마음속 하나님이 차지하셔야 할 자리를 그 자녀가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녀에게 더 많은 시간과 관심과 생각을 바칩니다. 그들은 자녀에게 더 많은 관심이 있으며, 자녀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심지어 교회 출석마저 한편으로 제쳐둡니다. 내 삶에서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할 자리를 대신 차지한 사람은 누구나 우상이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일과 직업을 섬깁니다. 그들은 그것을 위해 살아가며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직업에서 성공을 거두고 보다 나은 지위를 얻기 위해 하나님을 한쪽으로 밀쳐 버립니다. 직위는 그에게 너무도 중요하고 다른 무엇보다도 얻기를 바라는 것이며 삶의 목적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것은 모두 우상입니다. 아마도 최고의 우상은 자아일 것입니다. 내 생각에 다른 모든 우상이 결국에는 자아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자기 조국을 숭배하는 자들은 그것이 자신의 조국이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그들은 다른 나라는 섬기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들은 다른 나라 출신이 아니고 자기 나라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에게 집요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항상 자아입니다. 우리가 각별히 유의해야 하는 궁극적 우상은 바로 이 무서운 자아입니다. 자신에 대한 관심,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두는 일 등 나 자신과 나의 관심과 나의 위치와 나의 발전과 직결되는 것, 곧 나 자신과 거기서 비롯되는 모든 것이 우상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두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영적 삶에서 가장 큰 위험은 우상숭배이며 우리의 모든 활동 속으로 침투합니다. 이 사실들을 생각하면서 자신을 점검해 보십시오. 나는 어떤 가짜 우상을 섬기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십시오.. 혹 나를 우상으로 섬기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은 영적 삶에서 가장 위험을 주는 것은 우상 숭배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상 숭배에 대한 세 가지 특별한 측면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다음은, 우상 숭배에 대항해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21절"너희 자신을 지켜"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마치 우상 숭배라는 무서운 대적과 대치하는 요새 속에 있는 것처럼 자신을 지켜야 함을 의미합니다.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 "가서 하나님께 부탁드리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이 무서운 위험을 자각하고 있다면, '여러분'이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얼핏 보면 요한이 스스로 모순되는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18절에서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두 내용을 함께 살펴볼 때 우리는 큰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호를 받기 때문에 계속 범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요한은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이 스스로 모순되는 말을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성경에서 시종일관 발견하는 것과 같은 완벽한 조화를 이룹니다. 빌2;12-13절"빌 2;12-13절"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 여러분은 똑같은 것을 구약성경에서도 발견합니다. 예를 들어 사 26:3절"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 하도록 지키시리니”라는” 말씀이 그렇습니다. 즉 "주께서 그를 평강에서 평강으로 지키시리니"라고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시겠지만 그분을 향한 신자의 심지가 견고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지키실 것이며, 악한 자가 결코 우리를 자신의 손아귀에 다시금 사로잡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해야 한다는 단서가 따릅니다. 달리 말해 자신을 지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여러분과 내가 성령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의 마음을 고정시킨다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지키실 것이며, 악한 자가 우리를 건드리지도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악한 자와 더불어 일대일로 싸워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할 일은 나 자신을 지켜 그리스도와 더불어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고, 그리하면 그분이 나를 대신해 대적을 물리치실 것입니다. 나는 응당 하나님께 바쳐야 할 나의 시간과 정열을 우상에게 바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나는 끊임없이 경계해야 합니다. 나의 지각과 생각을 지켜야 하며, 마음과 정신을 경계해야 합니다. 따라서 부단히 경계하고 기도하며 경계하는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영적 삶에서 가장 위험을 주는 것은 우상 숭배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상 숭배에 대한 세 가지 특별한 측면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나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먼저 항상 자신에 관한 진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사신 바 된 자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요한이 19절에서 상기시킨 바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달리 말해 하나님께 속하고 그리스도께 속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하며 다른 어떤 것들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나는 이생과 세상에 있는 그 무엇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내게 이런 선물들을 주셨지만 그것들 중 무엇을 나의 신으로 삼는다면, 나는 그것들을 남용하는 셈입니다. 그것은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섬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길은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상들의 진정한 특성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상들을 아무리 높이 치켜세운다고 해도 과연 숭배와 찬탄받을 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시간의 제약을 받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숭배와 신앙에 합당한 그 무엇이 있습니까?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일시적이고 끝을 향해 나아갑니다. 영속적이고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의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들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제대로 잘 사용합시다. 그것을 전적으로 의지할 만한 것으로 간주하지 맙시다. 돈, 소유, 지위, 성공, 다른 어떤 사람, 자녀, 이생과 세상에 속한 다른 그 무엇을 영원한 나의 신으로 섬기다는 것은 비극적이지 않습니까? 그 모든 것은 지나가버립니다.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항이 바로 그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자신을 우상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길은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기억하고 그분과 교제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상 숭배에 빠지려는 시험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의 성품과 존재를 다시금 생각합시다. 우리에게 제공된 특권은 그분을 섬기고 그분과 동행하며, 그분을 알고 그분과 교제와 대화를 나누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 거룩하신 임재 안에서 영원토록 살아가기 위한 것임을 기억합시다. 중국 선교의 위대한 선구자인 허드슨 테일러가 매우 좋아했던 기도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가 죽은 후 사람들은 그의 일기장 속에 끼어 있는 종이 조각을 하나 발견했는데, 거기에 이 기도문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매일 일기장을 넘기면서 그 기도문도 같이 넘기며 묵상했음에 분명합니다. “주 예수여 당신으로 하여금 내게 생기 넘치고 찬란한 실체가 되게 하시며, 외관상 볼 수 있는 그 어떤 사물보다도 믿음의 눈에 더욱 선명하게 보이게 하시며, 세상에서 가장 감미로운 관계보다도 더욱 사랑스럽고 친밀한 관계이게 하소서”.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친밀하심과 임재를 자각하며, 그분과 동행함을 깨달으며, 그분과 함께 또 그분 안에 있음을 알아야 하며, 아무것도 그 누구도 우리와 그분 사이를 가로막을 수 없다라는 사실을 항상 그리고 영원히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상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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