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에 대한 이론/그리스도 중심적인 강해 설교

참된 안식

wordlove 2024. 10. 6. 15:15

1. 본문: 11:28-30

2. 명제: 참된 안식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선언적 명제

3. 제목: 참된 안식

 

28절의 말씀을 함께 생각하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들에게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우리들의 현실이 어둡고 거칠어도 주님께서 여전히 동일한 은혜의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신다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우리 주위를 돌아보아도 우리는 우리를 위로하거나 격려해 주거나 희망을 주는 것들을 찾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이제 성경의 종말에 대한 메시지를 믿으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평소 잘 믿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어느 교인이 목사님 정말 세상의 종말이 오는 것 같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이 같은 세상에서도 우리 주님의 말씀이 아직도 들려 옵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처한 현재의 상태와 우리들의 느낌을 그대로 정확하게 보시고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이것은 또 하나의 단순한 명령이나 엄격한 계율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이 세상이 우리에게 지금 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회초리를 사용합니다. 우리는 모두 지쳐 있는 데 더 힘을 쓰라고 세상은 요구합니다. 우리는 항상 더 많은 것을 시도해 보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노력을 더 해보라는 어떤 무리한 요구가 아니고, 하나의 선물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참된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선포합니다. 참된 안식을 얻기 위해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첫째, 이 세상과 우리 인생의 가장 큰 필요는 안식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피곤합니다. 우리 세상이 평온하지 못하고 안식이 결핍된 것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입니다. 현대인들의 입에서는 늘 '바쁘다' 말이 나옵니다. 우리는 모두 바쁩니다. 우리는 시간이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안정과 균형과 평정의 결핍을 목격합니다. 뉴스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은 평안함이나 안정의 고요한 목소리가 아니고 불화와 다툼과 혼란의 아우성입니다. 전쟁과 태풍과 폭우와 국제적 경제 질서의 불안정이 해소될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불안정합니다. 우리는 화산 위에 앉아 있거나 넓은 대양에서 파도에 흔들리는 배를 타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차분하게 살 능력이 없는 듯합니다. 사람들은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엔가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산업적으로, 사회적으로, 가정적으로 불화와 오해가 산적되고 있습니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모두 평온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거칠고 신경질적이며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불행해 보입니다. 현대인들처럼 환락에 광분한 세대가 없었습니다. , 마약, 게임, 동성연애 등의 늪에 빠져갑니다. 그들은 많은 시간과 정력을 환락을 위해서 사용합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뿐입니다. 그들은 그런 향응이 없으면 인생을 직시하고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불행합니다. 인생의 모든 불행은 이 같은 불안정에서 기인하고 있습니다. 날로 급증하는 별거와 이혼들도 결국 이 불안정의 원인으로 소급될 수 있습니다. 이혼 부부들은 헤어지기만 하면 원하는 것을 취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종국에는 안식이 없다는 것을 지각하고 또 다른 실험을 시도합니다. 한 여인과 한 어린아이가 강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사연인즉. 그 여인은 인생살이가 지겨워서 자살한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기혼 여성이었는데, 남편과 떨어져서 다른 남성과 동거 중이었습니다. 딴 남자와 살면 행복을 찾을 수 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행복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안식과 화평을 원합니다. 사람들은 평온하고 조용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그렇지만 현대 사회는 안정이 모자란 사회입니다. 우선 양심이 불안정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자기 자신들로부터 도피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양심이 우리를 정죄합니다. 불편한 양심은 우리를 쉬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양심으로부터 이탈하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도 크고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속에는 만족을 찾는 아우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주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안식입니다. 참된 안식을 얻기 위해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두 번째, 안식은 하나님의 지식 속에서만 찾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11:27"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다음의 초대 말씀을 주셨습니다. 28" 수고하 무거운 짐 진 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러니까 우리 주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내가 홀로 가지고 있는 아버지를 아는 이 지식이 곧 안식의 비결이다." 이것이 본 절과 앞절사이의 관련성입니다. 인간이 누리는 모든 종류의 안식이나 그 어떤 안식도 거짓된 안식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초대에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안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안식 상태에 많은 사람이 들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이유에서 입니다.. 그들이 인생의 문제들을 직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잘못을 저지르고 꾸중을 들으면 이를 싫어하기 때문에 즐겁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들에게 등을 돌려대고 자기 자신들의 세계로 들어가 버립니다. 그들은 장난감들을 가지고 자기들만의 멋진 세계에서 즐겁게 놀면서 아주 행복해합니다. 어른들도 그런 식으로 사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인생을 직시하기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고의로 삶의 문제들을 생각하지 않고 그 위에 옷을 덮어 놓습니다. 어떤 이들은 온갖 수단으로 안식을 얻어 보려고 노력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술, 게임 중독, 약물 중독에 빠지기도 합니다. 마약 중독자들은 약을 먹거나 주사를 맞으면 한동안은 온 세상이 마냥 즐겁고 아무 문제가 없는 듯이 느낍니다. 그러나 그것이 참된 안식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한 종류의 인위적인 안식일뿐입니다.. 사실상 이 세상에는 여러 형태의 약들이 많습니다. 환락도 일종의 약입니다. 어떤 이들은 환상의 세계를 만들면서 거짓된 안식을 찾습니다. 인간은 이상한 존재들이어서 심리적인 속임수를 자신과 타인들에게 사용합니다. 이런 안식은 큰 위기가 오거나 인생의 심각한 질문들에 봉착하면 거짓이라는 사실이 너무도 빠르고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당신이 어떤 큰 슬픔을 당하거나 가까운 자와 사별하거나 혹은 당신 자신이 죽음의 병상에 눕게 되면 당신은 더 피하지 못합니다. 당신은 현실을 직면해야 합니다. 당신은 자신을 계속 약으로 중독시키면서 살 수 없습니다. 당신의 돈이 떨어지거나, 당신이 이룬 어떤 일이 무너지거나, 불가피한 인생의 사건들이 터지면 위에서 지적했던 그 모든 것들이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때 자살이 시도됩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실패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우리 자신들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내 우리는 인생 문제를 직면해야 합니다. 우리는 끝이 부득불 오고야 만다는 것을 압니다. 그때가 오면 그 어떤 것들도 우리에게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거짓된 안식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안식이 하나님을 아는 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을 떠나서는 결코 안식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Augustine)의 말은 너무도 적절합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 자신을 위해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영혼은 당신 안에서 안식을 찾을 때까지 쉬지 못합니다." 우리들의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만족할 때까지는 아무것도 우리에게 안식을 주지 못합니다. 이 세상을 보십시오. 현대 사회의 온갖 부귀, 문화, 교육, 기타 눈부신 기술이 있음에도 우리 주변에는 안식이 없고 불안정과 갈등투성이입니다. 57:21"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떠나서는 안식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참된 안식을 얻기 위해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마지막으로. 우리 주님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실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28-29"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여기서 예수 님이 자신을 계속 언급한 점을 주목하십시오. 주님은 사실상 자신을 세상 모든 것들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주님의 주장은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만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실 수 있고, 다른 사람은 그 누구도 또는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무거운 짐을 지고서 일하는 사람에게는 안식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가장 절박한 것이 하나님을 아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찾으려고 애씁니다. 그들은 이런저런 시도를 해봅니다. '수고하는' 자들에 대한 전형적인 한 실례는 회심 이전의 마틴 루터입니다. 그는 이 세상을 떠나 종교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가족과 친구들을 떠나 자신의 좁은 밀실에서 금식하고 땀 흘리며 염주를 세면서 기도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이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존전에 설 수 있을 만큼 선한 사람이 되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을수록, 삶을 살면서 하나님을 찾아보려고 하면 할수록 그는 자신의 죄 많음과 하나님의 절대적인 거룩함을 더욱 깊이 절감할 뿐입니다. 가령 당신이 하나님을 찾아보려고 시도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을 찾지 못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그런데 당신이 이 하나님의 지식을 얻기 위해 조언을 구하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철학서를 먼저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궁극적이며 절대적입니다. 당신은 존재 자체에 관한 전체적인 문제부터 고찰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당신에게 철학의 짐을 지워 줍니다. 이제 당신은 또 다른 사람의 조언을 받습니다. "당신은 철학서들을 내던지십시오. 당신은 신비 사상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을 찾는 비결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을 아예 중단하십시오. 당신은 자신을 비우고 영혼의 어두운 밤을 통과해야 합니다. 당신은 자신을 잊고 느슨해진 상태에서 온전히 피동적으로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잊어버리라고 말하는 것은 남들에게 하나의 짐을 얹어 주는 일입니다. 그 일이 너무도 힘들기 때문입니다. 도덕적인 짐도 당신의 등 위에 얹힙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그분은 거룩하십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알고 싶다면 당신은 새 삶을 살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결심하고 새롭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성경을 읽고 십계명과 산상보훈을 묵상하며 새로운 각오 밑에 제대로 살아 보려고 힘씁니다.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싶다고 말할 때 사람들이 우리에게 건네주는 조언이 이런 것들이 아닙니까? 더 많은 짐을 사람들은 우리에게 더 지워 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주님이 언급하신 당시 유대인들은 614가지의 율법들을 가진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을 익숙하게 알았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서 "무거운"무거운 짐을 사람에게 지운다"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영혼의 안식을 받고 싶다고 말하면 우리에게 이처럼 무거운 짐을 지워 줍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해 주고 진정한 안식을 제공해 주십니다.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해 주실까요? 복음 메시지로 해 주십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질문에 대답해 주심으로서 안식을 주십니다. 나는 양심의 안식도 원합니다. 내가 수치스럽게 느끼는 일이 전혀 없습니까? 우리들의 양심은 우리를 정죄하고 고발합니다. 내가 그런 부끄러운 과거를 어떻게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철학이 나를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도덕적인 노력이나 신비주의가 나를 도울 수 있을까요? 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은 단 한 분뿐입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으로 나의 모든 죄를 감당하셨습니다. 내 모든 죄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처리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내 양심이 안식합니다. 나는 내 죄의 빚이 십자가에서 갚아진 것을 압니다. 나의 죗값은 지급되었고, 내 죄는 씻기어졌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나는 하나님이 내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알고 싶습니다. 주님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나를 보아라. 그러면 너는 하늘 아버지를 보고 있다. 하나님을 알고 싶으면 나를 보아라." 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즉 복음 속에서 절대적인 진리를 직접 만나게 됩니다. 복음은 나의 모든 질문에 답변해 줍니다.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복음은 내 마음과 소원들도 만족하게 해 줍니다. 내 마음의 온갖 동요와 불안정이 주님께서 불어넣으시는 평안의 호흡으로 모두 잠재워집니다. 주님은 내 주변의 환경과 세상에서도 내게 안식과 평안을 제공해 주십니다. 이 소란한 세상에서 어떻게 안식할 수 있겠습니까? 20세기 이후에 와서 우리에게 이상적이고 완전한 세상을 약속한 자들은 철학자들과 정치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약속은 결국 빈공약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와 정반대를 약속하셨습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죄를 짓는 한, 이 세상은 항상 요란스럽고 불안정할 것입니다. 내가 현 세상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것도 복음 안에서 가능합니다. 전쟁과 천재지변이 일어나고 온 세상의 기초가 흔들리더라도 나는 전능하신 주 하나님이 만물을 다스리신다는 새로운 인생관을 가지고 담대하게 살 수 있습니다. 나는 이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으며, 부활하여 승천하신 것을 압니다. 나는 이 그리스도가 자기 원수들을 자신의 발등 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하늘 아버지의 우편 보좌에 앉아 기다리신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재림하셔서 죄와 악의 세상을 모두 뿌리 뽑고 멸망시킬 것을 압니다. 그때 벧후 3:13'3:13'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은 모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와 함께 머물며 영원토록 다스리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복음은 내가 사도 바울의 확신에 전적으로 동감하게 합니다. 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나를 위해 죽기까지 하신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 이것은 환경과 상관없는 온전한 안식을 줍니다. 이 안식은 폭풍 속에서도 평정을 누리게 합니다. 이 어두운 죄의 세상에서 온전한 평안함이 어디 있나요? 예수 님의 피가 내 속에서 평안, 평안이라고 속삭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초대입니다. 주님은 아직도 같은 초대의 말씀을 우리에게 하고 계십니다. "내게로 오라."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오직 주님만이 완전한 안식을 알고 누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예수 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평안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까지 넉 23:46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안식의 초대를 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당신은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오십시오.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9"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모든 자에게 이 얼마나 복된 말씀입니까. 불행한 인생을 사는 자들에게, 안정이 없는 자들에게,만족을 찾지 못한 자들에게, 얼마나 복된 초청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십시오. 주님께 당신 자신과 당신의 상태를 알리십시오. 당신을 주님께 넘겨 드리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러면 주께서 여러분에게 참 안식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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