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에 대한 이론/그리스도 중심적인 강해 설교

예수님 품 안에서 누리는 안전함

wordlove 2024. 8. 25. 15:01

1. 본문:요일 5: 18

2. 명제: 하나님으로부터 난자인 그리스도인이 확신해야 하는 것이 있다.

(선언적 명제)

3. 제목: 예수님 품 안에서 누리는 안전함

 

우리는 사도 요한이 요한 일서의 추신인 세 가지에서 각기 14. 18"우리가 아노라" 혹은 20"또 아는 것은"이라는 확신을 덧붙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실제로 요한은 앞에서 영생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은 응답을 받을 것을 믿고 기도 할 것과 특히 죄에 빠진 형제자매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 모든 언급을 마친 후에 오늘 본문 18절을 언급한 것입니다. 그는 17절에서 "모든 불의가 죄"이지만,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고, 그런 상태에 있는 자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요한은 특별한 언급을 제시합니다. 18"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그런데 이 구절 해석에 대한 어려운점이 있습니다. 완전주의의 모든 교리는 종종 이 구절 및 그와 비슷한 내용인 요일 3:9절을 기초로 삼았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 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이 구절은 오랜 세월 동안 완전주의자들의 위대한 제목 역할을 해왔습니다. 우리는 사도가 한 말에 대해 다시 한번 더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한 구절을 문맥 속에서 따로 떼어 내어 거기에 기초해 어떤 이론이나 교리를 세우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습니다. 모든 이단이나 오랜 교회사에서 발견되는 오류들이 대개 그런 식으로 발생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성경 본문을 취하고는 "성경이 이렇게 말한다. 따라서......"라고 주장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들은 문맥을 잊어버립니다. 성경이 항상 성경과 비교되어야 함을. 성경은 결코 자체적으로 모순되지 않다는 것을, 성경 메시지가 시종일관 동질성과 통일성을 보여 준다는 것을 망각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인 그리스도인이 확신해야 하는 것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먼저, 그리스도인은 계속해서 죄를 지을 수는 없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18절 말씀을 얼핏 보면 요한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말은 수많은 완전주의자로 하여금 자신이 죄를 지을 수 없다고 주장하게끔 만들었습니다. 요한은 요일3:9절에서도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으로 그가 죄를 짓지 않는다 “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다. 요한은 내가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죄를 지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이다. 내게는 죄짓는 일이 불가능하다."라고 주장합니다. 이 구절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대한 해답은 문맥에서 발견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거듭난 사람이요 하나님께로부터 난자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요한이 앞의 16-17절에서 죄에 빠진 형제를 위해 기도하라고 권해야 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과연 요한은 그리스도인이란 실제로 사실상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인이 죄를 짓지 않는다면 죄에 빠진 형제를 위해 기도하라는 권면이 필요할까요? 그러나 지금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요한은 여기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인 그리스도인이 특정한 범죄에 빠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말은 무슨 뜻입니까? 먼저 요일3:9절을 살펴봅시다..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면 누구나 계속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여기 죄를 짓지 아니하노니 “라는“ 헬라어 동사 시제는 동직설 현재 능동 3인 단수 로써 계속해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 18절의 범죄하지 아니한다 “라는“ 헬라어 동사도 요일 3:9절과 같은 시제입니다. 요한은 이 시점에서 행위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태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상태에 관심을 기울일 뿐 그리스도인의 특정한 행위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가 단언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면 누구나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않은 모든 사람과는 다른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않은 사람들은 "악한 자 안에처해 있습니다. 그들은 사탄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그들의 모든 삶은 죄의 삶이며, 죄가 그들의 영역이며, 그들은 죄 안에 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은 더 이상 그런 상태에 있지 않으며 거기서 벗어났습니다. 요한이 요일 1장에서 언급한 사항을 통해 이 점을 살펴봅시다..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않은 사람은 어둠 속에 걸으며 살아가는 자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빛 가운데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합니다. 요한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은 계속해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들은 죄 가운데 빠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난자는 거기 거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상태가 아닙니다. 이 구절을 이해하는 방법은 그것을 두 영역으로, 곧 어둠의 영역과 빛의 영역으로 혹은 사탄의 지배와 하나님 및 그리스도 나라의 지배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않은 사람들은 낮은 차원의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이따금 자신을 향상하려는 노력을 하며 잠시 스스로를 일으키려고 시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뒷걸음질을 치고 맙니다. 아래로 추락하는 것, 그것이 그들의 수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난 그리스도인은 높여졌습니다. 그리스도에 의해 새롭게 높은 곳으로 올려졌습니다. 그리하여 삶의 수준은 높아졌습니다. 물론 그들도 때로는 안타깝게도 죄 가운데 빠지지만 그것은 거기 낮은 수준에서 계속 거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들은 넘어지고, 회개하며, 다시금 높은 삶의 수준을 회복합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강조하려는 것은 거듭난 신자의 살아가는 삶의 수준입니다. 요한의 확신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은 더 이상 죄악된 수준에서 살지 않으며 보다 높은 수준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모든 영역이 다르며 변했습니다. 그들은 넘어질 수 있으며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 바닥에 쓰러져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른 영역에 속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본래 영역입니다. 그들은 계속해 죄 가운데 머물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죄를 짓지 않습니다. 혹은 요한이 좋아하는 표현을 쓰자면, 그는 죄 안에 거하지 않습니다. 사도는 여기서 특정한 행위나 행실이 아니라 성품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어느 그리스도인의 고백입니다. " 회심하기 전에 나는 매우 기질이 나쁜 사람이었으며, 그것은 내 삶에서 커다란 문제점이었다. 나는 그것을 통제할 수 없었다. 일단 회심하기만 하면 그것이 영원히 제거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이 여전히 그 속에 빠져 있음을 발견했다."그러나 그는 더 이상 기질이 나쁜 사람이 아니며 그것으로부터 건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줄곧 조심해야 합니다. 이전의 기질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를 근심하게 하는 것은 아직도 냉정을 잃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간혹 발생하는 예외가 되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수준에서 살고 있으며 성미가 급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그의 성격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그리스도인은 계속해서 죄를 지을 수는 없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확신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다음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낳음을 받았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 18"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 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사"" 요한의 강조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한다." 왜일까요? 이는 "하나님께서 나신 자" 때문입니다. 여기서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는 탁월하신 분으로서 다름 아니라 우리 주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로서 난자를 지키는 대상이 '그분'이지 '인간 그 자신이 아닙니다. '나신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면 따라서 다음과 같이 이해됩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범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그를 지키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지키다'는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단어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그를 보살피고 돌보고 또한 주시하신다는 뜻입니다. 또한 그분이 그를 의도적으로 살피심을 뜻입니다. 나는 사도가 여기서 말하고자 했던 바가 바로 그것임을 확신합니다. 이미 연세가 90세 노인인 요한 사도는 시험과 시련을 당하며 교회 안팎의 문제들로 괴로움에 처한 성도들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들이 알기를 원했던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독생자가 그들을 돌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런 의미에서 그들을 지키고 계십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의 파수꾼이십니다. 결코 주무시지 않고 항상 깨어 계십니다. 나는 요한이 여기서 전하기를 갈망하는 사항이 바로 이것임을 여러분에게 알려 주고자 합니다. 10:28절에서 주님은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그분은 하나님의 백성을 지키실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분의 대제사장적 기도가 언급되기도 했습니다. 17:11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계속해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7:12.15"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은 세상에서 데려가시기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 위함이니이다" 유다가 우리에게 상기시킨 내용과도 동일합니다. 24"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발견하는 큰 위안과 위로를 주는 교리들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이 힘들고 모순된 세상에서 자신의 연약함과 무기력함을 자각할 때, 사도 바울이 롬 5:10절에서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분이 우리를 구하기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심으로, 그분은 우리를 지키실 것이며 돌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그리고 처한 상황이 아무리 괴롭고 힘들지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영혼의 목자요 수호자이심을 확신합시다. 또한 그분이 우리를 보살피고 계시며 주목하고 계심을 확신합시다. 그분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시험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며, 항상 고전 10:13"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실 것이다 ““ 이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리십시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신자 즉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낳으신 그의 자녀를 지키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이 죄 속에 거하거나 계속 머무르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확신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마지막으로, 악한 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붙들지 못함을 확신해야 합니다.

18"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여기서도 주의 깊게 살펴볼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만지다'는 단어입니다. 보통 만진다는 것은 가볍게 손을 대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이 단어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20:17절에서 같은 단어를 발견할 것입니다. 거기에 보면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고 붙들려 하자, 주님은 그녀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마리아, 내게 매달리지 말라.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이 여기서 말하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악한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을 붙들지 않습니다. 그 악한 자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매달리지도 않으며, 그들을 껴안지도 않습니다. 그는 그들을 다시금 자신의 수중에 넣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여러분은 그것이 앞의 가르침과 너무도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가 '만지다'는 단어를 단지 통상적 의미로 생각한다면, 사실상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시험을 당할 수 조차 없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그런 생각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요한은 우리가 거듭났으므로 그러한 의미에서 만짐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시험할 것이며 시련을 겪게 할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괴롭힐 것이며, 낙심시키고 비참하게 할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좌절시키며 불행하게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지만 우리를 자신의 수중에 다시 넣지는 못할 것입니다. 요한이 말하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일을 행할 수 있지만 우리를 다시금 붙잡지는 못합니다. 12:11"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악한 자는 그들을 다시 붙들려고 애썼으며, 그들을 설득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다시 자신의 손아귀에 넣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겼습니다. 그는 우리를 시험할 수 있으며, 우리의 어리석음을 이용해 우리를 꾀어 죄를 범하게 할 수 있지만 우리가 다시 그에게 붙들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구속은 완전한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으며, 해방되고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속했으며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천국의 가족에 속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과 결점으로 종종 사탄과 그의 교묘한 유혹과 제안에 귀를 기울일 수도 있지만 요한의 그 위대한 언급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악한자''악한 자'는 결코 우리를 다시 붙잡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결코 우리를 붙들거나 껴안지 못할 것입니다. 그다음 구절은 그 모든 것을 말합니다. 요일 5:19"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악한 자란'이란 사탄의 손아귀를 뜻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받는 성도인 저와 여러분은 결코 그리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품 안에서 보호를 받으며, 사탄의 손아귀에서 가장 멀리 벗어나 있습니다. 결국 악한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그분의 소유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로서 계속 죄짓지 않도록 해주심을 확신합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주목하고 있으며 또한 돌아보며 지키고 있음을 확신합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탄의 시험을 받을 때, 사탄에게 속하지 않고 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항하여 물리칠 수 있음을 확신합시다. 우리는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사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게 하시고, 우리를 기다리는 영광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갖추게 하심을 확신합시다. 이 놀라운 진리를 알고 믿고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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