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에 대한 이론/성경적 설교 작성법

내가 만든 신 성취

wordlove 2023. 4. 23. 15:39

1. 본문: 왕하 5:2-3

2. 본문 요약: 나아만 장군의 부인의 시종 드는 이스라엘에서 잡혀 온 어린아이가 우리 주인이 선지자 앞에 가면 나병이 나을 수 있다고 했다.

3. 주제: 내가 만든 신 성취(성공)

4 테마: 내가 만든 신 성취의 허무감

5. 명제: 내가 만든 신 성취의 허무감을 알고 깨어질 때 구원에 가까워질 수 있다. (가능성의 명제)

6. 목적: 내가 만든 신 성취의 허무감의 실체를 직시하고 깨어짐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단계를 소개하기 위해서

7. 질문제기: 내가 만든 신 성취에서 깨어지는 단계는 무엇입니까?

8. 전환 문장: 내가 만든 신 성취의 허무감을 알고 깨어질 때 구원에 가까워질 수 있다. 내가 만든 신 성취에서 깨어지는 단계는 무엇입니까?

9. 대지

10. 제목: 내가 만든 신 성취/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

 

팝의 전설 마돈나는 성공의 유혹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엄청난 의지의 소유자이지만, 여태껏 내 모든 의지는 늘 끔찍한 열등감을 극복하는 데 있었습니다. 주문(呪文)을 깨면 당장은 특별한 사람이 되지만 다시 열등감의 무대에 서면 내가 평범하고 재미없어 보입니다. 내 삶의 동력은 평범함에 대한 아찔한 두려움에서 옵니다. 그것이 늘 나를 몰아가고 또 몰아갑니다. 이미 대단한 존재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내가 대단한 존재임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고뇌는 끝난 적이 없으며 아마 영영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마돈나에게 성공이란 자신의 중요성과 가치를 느끼게 해 주는 마약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도취감이 금방 사라져 다시 복용해야 합니다. 자꾸만 자신을 증명해야 합니다. 배후의 동기적 욕구는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입니다. '성취 중독자'도 모든 부류의 중독자와 다른 바 없습니다. 결국, 성취는 다음과 같은 중대한 질문에 제대로 답해 주지 못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가?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성취는 처음에만 신기루 같은 답을 내놓습니다. 처음에는 행복감이 확 밀려들어 마치 우리가 성공했고, 안으로 들어갔고, 수용되었고, 자신을 증명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 만족감은 금세 사라집니다. 개인적 성공과 성취는 여느 우상보다 더 우리에게 자신이 신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내 안전과 가치는 나 자신의 지혜와 힘과 행위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성공해 정상에 오르면 당신이 최고다. 성공을 우상으로 삼았다는 한 가지 징후는 성공이 가져다주는 거짓된 안전감입니다. 자기 당대에 세상 최고의 성공과 권력을 거머쥔 사람 중 하나로 나아만이 있습니다. 열왕기하 5장에 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의 삶은 최고뿐이었습니다. 오늘날 시리아에 해당하는 아람의 군대 장관이었고, 또 부자에다 온갖 훈장과 포상에 빛나는 용맹한 군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위대한 성취와 능력에 맞서는 호적수가 있었습니다.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 환자더라(왕하 5:1). 보다시피 열왕기하의 저자는 명예와 성취를 쭉 늘어놓다가 돌연 이 모두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고 덧붙입니다. 성경에서 나병은 여러 가지 치명적인 소모성 피부 질환을 아우르는 말입니다. 환자는 점점 불구가 되고 형체가 일그러져 결국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당시 이 병은 지금의 암과 같았습니다. 나아만의 몸은 서서히 산화하는 중이었습니다.. 몸이 부풀어 오르고 살갗과 뼈가 갈라져 조금씩 떨어져 나가면서 서서히 죽어 갈 것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재물, 무공, 대중의 환호 등 모든 것을 갖추었으나 그 속에서 말 그대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나아만은 성공과 돈과 권력을 쥐었지만 나병 환자였습니다. 나아만의 나병이 현실을 대변해 주듯이 성공은 우리가 바라는 만족을 결코 가져다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내가 만든 신 성취의 허무감을 알고 깨어질 때 구원에 가까워진다고 말씀합니다. 오늘은 내가 만든 신 성취의 허무감의 실체를 직시하고 깨으짐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단계를 소개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성취의 신의 허무감에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깨어지기 위해서 알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먼저 길들여지지 않는 하나님은 알아야 할 단계입니다.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 들더니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왕하 5:2-3). 나아만의 아내가 부리던 여종이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자를 소개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절박한 심정으로 그는 엘리사에게 치료를 받으려고 바로 이스라엘로 떠났습니다. “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 "(5)은 물론이고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는 아람 왕의 추천서도 가져 갔는데, 편지에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 "(6)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나아만은 자신의 왕이 이스라엘 왕에게 친히 보낸 추천서에서 치료가 이미 확정된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성공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있음을 그는 몰랐습니다. 여종은 나아만에게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3)라고 말했을 뿐이었습니다. 곧장 선지자에게 가서 치료를 청하라는 뜻이었으나 이는 나아만의 세계관에는 맞지 않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거액의 치료비와 최고위급의 추천서를 싸들고 이스라엘의 서열 1위인 왕에게 갔습니다. 하지만 왕은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 줄 알라 하니라(왕하 5:7). 나아만과 아람 왕은 이스라엘의 종교도 실제로는 세상 나라와 똑같이 작용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도 곧장 왕에게 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은 편지를 읽고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 아람 왕이야 알 리가 없었겠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다르시며 왕 자신은 나아만의 치료를 명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인간에게 놀아나지 않으십니다. 돈으로 매수하거나 비위를 맞출 수 있는 대상도 아닙니다. 무엇이든 그분이 주시는 것은 은혜의 선물입니다. 이스라엘 왕은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7)라는 탄식으로 나아만 문제의 정곡을 찔렀습니다. 나아만은 성공을 우상으로 삼았습니다. 자신의 성취를 근거로 동급의 성공한 이들을 찾아가 필요한 것을 받아 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아만은 정말 훌륭하고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세상 최고의 사람도 하나님을 찾는 법에는 무지함을 보여 줄 뿐입니다. 나아만은 길들여진 신을 원했지만 그분은 야성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아만은 우리에게 갚아야 할 신을 원했지만 그분은 우리 쪽에서 보답해야 할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성취의 신의 허무감에서 구원을 얻기 위해 먼저 깨어지기 위해서 알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둘째는 너무 쉬워서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을 알아야 할 단계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왕하 5:8-9). 엘리사의 집으로 간 나아만은 거기서 보고 들은 바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선지자는 자신에게 임한 영광을 모르는 모양인지 아예 문 밖에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두 번째 충격은 그가 전한 말 자체였습니다.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왕하 5:10-13). 나아만은 엘리사가 돈을 받고 무슨 신기한 의식이라도 행할 줄 알았습니다. 돈을 받지 않을 거라면 적어도 자신에게 치료의 값으로 뭔가 '큰일'을 시킬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담그라는 말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노하며 돌아섰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시 나아만의 세계관이 송두리째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인간을 순전히 은혜로 대하시는 하나님과 맞닥뜨렸습니다. 나아만이 화가 났던 것은 자신에게 거창한 일을 시킬 거라는 예상이 빗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엘리사의 메시지는 모욕적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요단 강에 내려가 물장구를 치는 것은 바보나 아이, 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능력이나 성취가 전혀 불필요한 일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이란 선하든 악하든 관계없이, 강하든지 약하든지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며 그분의 구원은 얻어 내는 게 아니라 거저 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알기 전에는 나아만은 계속 우상의 노예로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만 그는 자신의 성공도 결국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게 됩니다. 요컨대 그냥 몸을 씻으라 라는 명령은 너무 쉬워서 순종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런 영적 겸손을 불러일으키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가면서 '제가 이만큼 했습니다'라든지 '제가 고생한 것 좀 보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만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냥 씻기만을 원하십니다. 나아만은 자신의 해로운 행위를 내려놓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성취의 신의 허무감에서 구원을 얻기 위해 먼저 깨어지기 위해서 알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세 번째는 용서와 은혜의 의미를 알아야 할 단계입니다.

성경 첫머리부터 암시되어 있듯이 하나님도 희생 없이는 용서하실 수 없습니다. 큰 피해를 본 사람치고 가해자를 그냥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당신이 돈이나 기회나 행복을 강탈당했다면 범인에게 보상을 받아내든지 용서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용서하려면 손해와 빛을 당신이 부담해야 합니다. 스스로 감수해야 합니다. 이렇듯 모든 용서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일까요? 나아만의 아내가 부리던 여종입니다. 그녀는 아람의 습격 대에 잡혀 왔습니다. 이야기 속의 그녀는 아람의 사회구조에서 가장 밑바닥 인생입니다. 인종적으로 외부인이고 종이고 여자인 데다 아직 어렸습니다. 아마 12-14세쯤 되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완전히 결딴난 인생이었습니다. 그게 누구 때문입니까? 군 최고사령관이자 육군 수장인 나아만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원수가 나병에 걸렸음을 알고 어떻게 반응했던가요? 복수하는 공상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 여종은 그런 덫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말했습니까? " 나병이라니, 거참 고소하다! 오늘 손가락이 하나 더 떨어져 나갔군! 내 그의 무덤에서 춤을 추리라! " 천만의 말입니다. 그녀가 한 말을 보라. “ 우리 주인이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왕하 5:3). 말 속에 연민과 관심이 묻어납니다. 정말 아픔을 덜어 주고 그를 살려 내고 싶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녀는 복수를 꾀하지 않고 만인의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상대를 용서하고 기꺼이 치유와 구원의 통로가 되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자신의 고통을 인내로 감당했습니다. 영국의 설교자 딕 루카스는 이 여종에 대해 " 그녀는 대가를 치르고 쓰임 받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이 자신의 희생을 얼마나 쓰실지 모르는 채로 고난을 감수하며 용서를 베풀었습니다. 언제나 고난당하는 종이 있어야만 용서가 가능하다는 성경의 이 주제는 예수님에게서 절정에 이릅니다. 고난당하는 종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다는 예언이 그분을 통해 성취되었습니다(53). 아버지와 함께 기쁨과 영광 중에 사시던 예수님이 그것을 다 버리셨습니다. 인간이자 종이 되어 구타와 체포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소위 친구들은 그분을 부인했고 더러는 배반했으며 모두 그분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용서하셨고,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죗값과 형벌을 친히 당하신 것입니다. 그분이 값을 치르셨으니 우리는 치를 필요가 없습니다. 성공을 숭배하는 자신을 질책만 해서는 이 우상숭배에서 헤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집착하는 대상은 많지만 그중 성공에 대해 가장 거짓말을 많이 합니다. 성공과 그 사촌인 돈이 우리를 안전하게 해 주고, 성공과 그 사촌인 권력이 우리를 중요하게 만들어 주며, 성공과 그 사촌인 명성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제 진실을 말해야 할 때입니다. 그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돈과 권력과 명예를 얻은 뒤 자멸합니다. 성공의 우상은 쫓아낼 수 없고 대체해야만 합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뭔가 소중한 대상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열등감을 해소하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자꾸만 뭔가 '큰일'을 하려고 듭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의 그런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에게 아무런 '큰일'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마침내 깨달으려면 고난당하는 크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해 주신 일을 봐야만 합니다. 큰일은 그분이 이미 하셨으니 우리는 할 필요가 없고 씻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이 다 해 주셨습니다. 그분이 다 이루어 주신일을 머리로 믿고 마음에 감격하면 그때부터 중독이 사멸됩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공하려던 욕구가 사라집니다. 성취의 신의 허무감에서 구원을 얻기 위해 먼저 깨어지기 위해서 알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마지막 단계는 연약함과 결핍을 인정해야 할 단계입니다.

나아만은 마음을 낮추고 요단강으로 갔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아이의 살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하건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하니 이르되 내가 섬기는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 앞에서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나아만이 받으라고 강권하가 거절하니라(왕하 5:14-16). 성경의 구원 이야기는 우리가 숭배하는 성공을 철저히 무너뜨립니다. 나아만은 병을 고치려면 차례대로 여종의 말과 엘리사의 종의 말과 자기 종의 말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당시에 지체 높고 힘 있는 사람들은 종을 노리갯감이나 노역하는 짐승 정도로밖에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종들을 통해 구원의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이 주제의 궁극적 모본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분은 왕궁에서 나신 게 아니라 마구간의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역하시는 내내 제자들은 묻고 또 물었습니다. 언제 권력을 잡으실 겁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겸손히 섬기다가 고문당해 죽으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도 그분은 당시 아무런 지위도 없던 부류인 여자들에게 맨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힘으로 받는 게 아니라 연약함과 결핍을 인정해야 받습니다. 그 구원은 힘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복종과 섬김과 희생과 죽음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여기 성경의 위대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미련하고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없는 것들을 택하여 있는 것들을 폐하신다(고전 1:26-31), 그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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