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창 29:31-35
2. 본문 요약: 야곱과 레아의 이야기는 인간이 만든 사랑은 결국 우상으로 흘러가 허무감으로 끝나지만 참 남편이신 예수를 통하여 진정한 만족을 누리는 인생으로 삼아 주셨음을 진술하고 있다.
3. 주제: 내가 만든 신 사랑
4. 테마: 내가 만든 신 사랑의 허무감
5 명제: 사랑 우상의 허무감에서 해방되는 길을 참 남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완성됩니다.
6. 목적: 인간이 만든 사랑 우상의 실체를 소개하고 참 남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삶을 살도록 촉구하기 위해서
7. 질문제기: 사랑 우상의 실체는 무엇이며 어떻게 우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8. 전환 문장: 사랑 우상의 허무감에서 해방되는 길은 참 남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완성됩니다. 사랑 우상의 실체는 무엇이며 어떻게 우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9. 대지
10. 제목: 내가 만든 신 사랑
건강을 해칠 때까지 일하거나 승진하려고 법을 어긴다면 일이 우상화되었다는 뜻입니다. 연인의 폭행과 가학 행위를 허용하거나 완전히 콩깍지가 씌어 병적인 관계를 보지 못한다면 사랑이 우상화된 것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면 노예가 됩니다. 사랑을 쫓아다니다 노예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이야기가 성경에도 있습니다. 창세기 29장에 나오는 야곱과 레아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사는 문화에서는 사랑을 하나님으로 혼동하기가 더 쉬워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에 휩쓸려 희망을 몽땅 거기에 겁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오셔서 그의 집안 곧 후손의 혈통을 통해 세상을 구속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쌍둥이를 임신했는데 하나님은 "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창 25:23) 라고 예언하셨습니다. 둘째로 태어날 아이가 메시아의 혈통을 잇도록 선택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예언에도 불구하고 맏아들 에서를 둘째 야곱보다 편애했습니다. 이삭의 편애 때문에 에서는 거만하고 버릇없고 고집 세고 충동적인 사람으로 자랐고, 야곱은 냉소적이고 울분에 찬 사람으로 자랐습니다. 차세대 족장을 축복할 때가 되자 늙은 이삭은 하나님의 예언을 무시하고 에서를 축복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차림새를 형처럼 꾸미고 눈이 어두운 아버지에게 들어가 감쪽같이 축복을 받아 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에서가 야곱을 죽이기로 작정했으므로 야곱은 필사적으로 광야로 도피해야 했습니다. 야곱은 1,000km 떨어진 메소포타미아 땅 화란를 향했습니다. 외삼촌 라반이 살고 있는 곳에서 목숨이라도 부지할 요량이었습니다. 오늘 저는 사랑 우상의 허무에서 해방되는 길은 참 남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완성됨을 전하기 위해 섰습니다. 사랑 우상의 실체는 무엇이며 어떻게 우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먼저, 사랑 우상은 양편으로 다 노예가 되게 만듭니다.
라반은 몸을 피하러 온 야곱을 받아 주었습니다. 라반에게 두 딸이 있으니 언니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 29:16-20). 히브리어 본문을 직역하면 라헬은 몸매가 좋은 데다 예쁘기까지 했습니다. 야곱은 그런 그녀에게 홀딱 반했습니다. 야곱이 신부의 값으로 제시한 7년분의 품삯은 당시의 통화 가치로 따지면 엄청난 액수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라헬을 사랑해서 7년을 며칠 같이 여겼다고 했습니다. 7년이 지나 드디어 야곱이 라반에게 말합니다. “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21절). 이 남자는 한 여자를 향한 정서적, 성적 열망으로 잔뜩 달아올라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야곱의 삶은 공허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소중한 어머니의 사랑도 잃었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는 더욱 몰랐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토록 아리따운 여인을 처음 봤으니 틀림없이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녀만 있으면 문제가 다 해결될 거야. 그래서 의미를 찾고 인정받으려는 마음의 열망이 온통 라헬에게 쏠렸습니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어네스트 베커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잃고 나서 이에 대처해 온 다양한 방식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인간은 자신이 어떤 목적을 위해 지어진 게 아니라 우연히 존재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삶의 의미는 어디서 올까요? 베커가 말한 "운명적 로맨스"가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주된 출처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더는 없으니 맨 먼저 떠오른 방법의 하나는 '로맨틱한 해법'이었습니다. 내면 깊은 곳에 본질에서 필요한 자존감을 인간은 이제 사랑의 대상에게서 찾으려 했습니다. 모든 영적, 도덕적 욕구가 이제 그 한 사람에게 집중됩니다. 한마디로 사랑하는 상대가 곧 하나님이 됩니다. 야곱이 한 일이 바로 그것이며, 베커가 지적했듯이 우리 시대의 허다한 이들도 똑같이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우리는 천생연분을 만나기만 하면 내 모든 문제가 치유될 거라는 환상을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대와 희망이 그 정도까지 커지면 베커의 말마따나 " 사랑하는 상대가 곧 하나님이 된다. ”그러나 그 역할을 감당할 연인은 없고 거기에 부응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쓰라린 환멸을 경험합니다. 야곱은 내면이 공허했기 때문에 '로맨틱한 사랑'이라는 우상숭배에 빠지기 쉬웠습니다. 그는 라헬을 얻기 위해 7년간 일하겠다고 했는데 이는 당시 신부를 데려올 때 치르는 통상적 값보다 거의 네 배나 많은 수준이었습니다. 비양심적인 라반은 야곱이 지독한 상사병에 걸려 있음을 보고 그 상태를 이용했습니다. 7년이 지나자 야곱은 라반에게 가서 "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라고 말했습니다. 풍습대로 성대한 혼인 잔치가 열렸습니다. 한창 홍이 무르익었을 때 라반은 얼굴에 베일을 덮어씌운 채 야곱의 아내를 데려왔습니다. 야곱은 술에 취한 상태로 그녀와 동침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보니, 레아였습니다. 야곱은 분노에 부르르 떨며 라반에게 가서 "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25절)라고 따졌습니다. 라반은 동생보다 언니가 먼저 결혼하는 게 이 지방 풍습임을 몰랐느냐고 태연히 응수했습니다. 그러면서 7년을 더 일하면 기꺼이 라헬도 주겠노라고 덧붙였습니다. 비수에 찔리고 덫에 걸린 야곱은 라헬도 얻으려고 7년을 더 봉사했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우상으로 섬겼기에 이후로 수십 년간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레아의 아들보다 라헬의 아들을 떠받들고 편애해서 모든 자녀의 마음에 상처와 원한을 남겼고 온 집안에 독소를 퍼뜨렸습니다. 흔히 사랑에 빠진 사람을 가리켜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라고 하는데, 정말 말 그대로라면 그 해로움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렇듯 우상숭배는 야곱의 삶을 망쳐 놓았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의 가장 큰 피해자는 레아일 것입니다. 레아는 '시력이 약했다'. 여기 '약하다'라는 말은 그녀가 사팔뜨기였거나 어딘가 보기 흉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레아는 그다지 볼품이 없었고 평생 동생의 절세 미모에 가려진 채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라반은 레아와 결혼하려고 값을 치를 남자가 아무도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금전 문제의 해답을 그는 야곱에게서 찾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레아에게 아버지가 원하지 않던 딸은 이제 남편이 원하지 않는 아내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했습니다. 레아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 여자였습니다. 이런 레아의 마음도 야곱만큼이나 공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반응도 야곱과 똑같았습니다. 야곱이 라헬에게 그랬고 이삭이 에서에게 그랬듯이, 그녀도 야곱에게 똑같이 했습니다. 마음의 희망을 야곱의 사랑을 얻어 내는 데 둔 것입니다. 본문 마지막 몇 구절만큼 서글픈 대목도 성경에 많지 않을 것입니다. “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하였으며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창 29:31-35). 레아는 가정의 전통 가치관을 통해 행복과 정체성을 찾으려 했습니다. 특히 당대에는 아들을 낳는게 최선의 방법이었으나 그것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모든 희망과 꿈을 남편에게 걸었습니다. '아들을 낳으면 남편도 나를 사랑하게 될 거고 그러면 결국 내 불행한 삶도 해결될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기를 낳을수록 그녀는 지옥 같은 외로움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자신이 가장 갈망하는 남자가 자신이 평생 따라갈 수 없는 여자의 품에 안겨 있으니 그 모습을 봐야 하는 하루하루가 형벌이었습니다. 날마다 심장이 비수에 찔리는 듯했습니다. 사랑 우상의 실체는 무엇이며 어떻게 우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두 번째는, 사랑 우상은 환멸로 끝납니다.
성경은 인류가 어떻게 현 상태에 이르렀고 하나님이 이를 바로잡으시고자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셨고 또 오실 것인지를 보여 주는 단일한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은 도덕적 사다리의 맨 꼭대기에 신을 올려놓고 우리에게 '너희도 열심히 기를 쓰고 제대로 살면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성경이 우리에게 거듭 보여 주는 것은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도 없고 구하지도 않을뿐더러 은혜를 받아도 감사할 줄 모릅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를 아우르는 큰 내러티브이고, 나머지 개별 이야기는 다 그 밑에 속합니다. 그렇다면 이번 이야기에서 배울 것은 무엇인가요?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환멸이 인생 전반에 깔렸음을 배웁니다. 야곱은 “ 라헬만 얻을 수 있다면 다 잘될 것이다 ”라고 말했고, 상대가 라헬인 줄로 알고 동침했습니다. “ 아침에, 보니, 레아였다 ”(창 29:25). 한 주석 가는 이 구절에 대해 “ 이는 에덴동산 이후로 인류가 경험해 온 환멸의 축소판이다 ”라고 주해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 희망을 어디에 걸든지 아침에 보면 라헬이 아니라 늘 레아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간절히 원합니다. 처음 사랑에 빠지거나 처음으로 외국을 떠올리거나 흥미로운 과목을 처음 접할 때 우리 안에 일어나는 동경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동경은 결혼이나 여행이나 학업으로도 정말 채워질 수 없습니다. 당신도 야곱처럼 결혼해서 가장 깊은 희망과 동경의 무게를 전부 상대에게 건다면 배우자는 당신 기대에 짓눌려 쓰러질 것입니다. 당신 영혼에 필요한 것을 다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최고의 배우자라도 별수 없습니다. 당신은 라헬과 동침한 줄로 알겠지만 일어나 보면 늘 레아일 것입니다. 이런 인류의 보편적인 실망과 환멸은 삶 전반에 퍼져 있으며, 특히 자신이 가장 희망을 둔 대상에게서 실감 납니다. 마침내 그 사실을 깨달았다면 당신은 네 가지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당신을 실망하게 한 그 대상을 탓하며 더 나은 대상으로 옮겨 갈 수 있습니다. 이는 우상숭배를 지속하는 영적 중독의 길입니다. 둘째로 자신을 탓하며 이렇게 자책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나는 실패자야. 남은 다 행복해 보이는데 왜 나만 불행한지 모르겠어. 나한테 뭔가 문제가 있나 봐. 이는 자기 혐오와 수치의 길입니다. 셋째로 세상을 탓하며 이성(異性)을 모두 싸잡아 저주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완고해지고 냉소적이고 공허해집니다. 야곱은 '운명적 섹스'를 추구했고, 전통주의자 레아는 아기를 낳으며 아내라는 신분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둘 다 좌절했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상대를 이상화하고 우상화해도 그의 현세적이고 부패하고 부족한 모습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야곱은 미모의 아내를 얻어 그녀에게서 자기 삶의 정당성을 찾으려 했으므로 상대에게 마음을 주면서도 그녀의 미성숙한 모습과 여러 결함은 보지 못했습니다. 레아가 섬긴 가짜 신은 섹스가 아니었습니다. 남편의 몸은 분명히 곁에 있었으나 그의 사랑과 헌신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레아는 그의 영혼이 자신에게 달라붙어 ‘연합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야곱이 거부했으므로 그녀의 삶은 늘 빈곤하고 불행했습니다. 모든 우상숭배는 사람을 노예로 만듭니다. 양쪽 다 우리를 눈멀게 해 인생의 지혜로운 선택을 막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 우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참 남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사랑 우상에서 해방됩니다. 레아는 이 슬픈 이야기에서 영적 성장을 보이는 유일한 인물입니다. 레아가 하는 모든 말에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레아는 그분을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다. “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창 29:32), 레아는 여호와에 대해 어떻게 알았을까? 레아가 여호와를 알 수 있었던 길은, 야곱이 자기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을 그녀에게 말해 주었을 경우뿐입니다. 이렇듯 그녀는 혼란에 빠져 힘들었지만 그런데도 인격적인 은혜의 하나님께 손을 내밀었습니다. 넷째 아들 유다를 낳고서 그녀는 "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35절)라고 말합니다. 이전의 세 아이를 낳고 선포하던 말과는 다릅니다. 이번에는 남편이나 아이가 언급되지 않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자기 마음의 가장 깊은 희망을 남편과 자녀에게서 떼어내 여호와께 둔 것으로 보입니다. 야곱과 라반은 레아의 삶을 앗아갔으나 그녀는 결국 주님께 마음을 드려 삶을 돌려받았습니다. 이 아이는 유다였는데 창세기 49장에 보면 훗날 진정한 왕이신 메시아가 바로 그를 통해 오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를 찾아오셔서 그녀를 예수 님이 나실 계보의 조상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주님은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친히 그녀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내가 참 신랑이다. 나는 남편 없는 자의 남편이요 고아의 아버지다.' 성경의 하나님은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구원을 이루시고 우리 힘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분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 사람, 연약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이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남편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신부입니다. 나아가 배우자가 없는 사람만 아니라 있는 사람도 하나님이 우리의 참된 신랑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 같은 배우자를 기대하고 결혼한다면 상대가 당신을 실망하게 할 것은 뻔합니다. 배우자를 덜 사랑하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더 알고 더 사랑해야 합니다. 레아의 삶이 가르쳐 주는 그분을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은 레아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분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 사람이 되셨습니다. 말구유에서 태어나셨고,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으며(사 53:2), 자기 땅에 오셨으나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모두가 그분을 버렸습니다. 예수 님은 아버지께마저 "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그분은 왜 레아의 후손이 되셨을까요? 왜 아무도 원하지 않는 사람이 되셨을까요? 당신과 나를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그 모습에 깊이 감격하면 다른 사이비 구주들은 우리 마음에서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내가 바라볼 대상 중 모든 가짜 신을 능히 물리치게 할 만큼 아름다운 분은 누구인가요? 이 질문의 답은 하나뿐입니다. 시인 조지 허버트는 십자가의 예수 님을 바라보며 이렇게 썼습니다. “ 내 사랑스러운 주여, 주님만이 내 생명이요 빛이요 아름다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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