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요일 4:11
2. 본문 요약: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 역시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3. 본문 주제: 은혜받은 자
4. 본문 테마: 은혜받은 자의 삶의 자세
5. 명제: 은혜받은 자는 형제 사랑이라는 믿음을 실천해야 한다.
( 명령적 명제)
6. 목적: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서로를 사랑으로 대해야 함을 소개하여
7. 질문제기: 은혜받는 자는 어떻게 형제 사랑이라는 믿음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8. 전환 문장: 은혜받은 자는 형제 사랑이라는 믿음을 실천해야 한다. 은혜받는 자는 어떻게 형제 사랑이라는 믿음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9. 대지
10. 제목: 마땅히 해야 할 일
우리는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측량했습니다. 이제 다음과 같은 말씀이 이어집니다. 11절" 사랑하는 자 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나는 우리의 영적 현주소를 진정으로 시험하는 것이 바로 이 같은 구절이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물론 9절과 10절은 본질적인 교리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인간과 죄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삼위일체와 성육신과 속죄와 부활과 승천 등에 관한 교리들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런 구절은 우리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를 밝히고 영적 상태를 진단해 줍니다. 기독교 복음은 묵상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또한 생명으로 제공된 것이요 살아가야 할 삶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것이며, 그것은 그 자체를 행동으로 보이고 나타냅니다. “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신약성경은 “ 너희가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고 그 모든 것을 믿는다고 말한다면, 너희에게는 다른 삶을 살권리가 없다. ”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약성경의 방식입니다. 신약성경의 서신들 중 대부분은 그 전반부가 순수한 교리이며, 수신자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하신 일과 그들이 처한 높은 위치를 상기시키는 내용입니다. 그러고 나서 기자는 " 그러므로…." 하라고 말합니다. 신약성경은 논리로 가득합니다. 그것은 "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여러분에게 죄를 짓지 말고 선하게 살아감으로써 일류의 삶을 살라고 권면하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전 6:19-20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따라서 여러분에게는 자기 몸을 음란을 위해 사용할 권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하신 일과 그들이 처한 높은 위치를 상기시킵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이 취하는 방식입니다. '이것을' 믿는다고 말한다면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은혜받은 자는 형제 사랑이라는 믿음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형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먼저, 나는 누구인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의 한 그리스도인이며, 다른 그리스도인도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구성원들이며, 나는 이 사람 중에 성가신 이들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는 내가 본성적으로 또 본능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그러했으며, 그것은 오늘날에도 똑같습니다. 요한이 이 위대한 호소를 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 사랑하는 자 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7절로부터 다음 장 첫 절까지에 이르는 이 모든 부분은 형제 사랑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여기서 그는 우리에게 이를 실행하려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여러분을 성가시게 하고 난처하게 하며 진정 상황을 어렵게 만드는 자들과 마주칠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 요한의 대답이 여기 있습니다. "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신 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이 말씀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지닌 본능적 감정에 따르는 대신, 단번에 말하거나 행동하거나 혹은 반응을 보이는 대신, 나는 잠시 멈추고 자신에게 말합니다. 나는 내가 믿는 기독교 진리를 스스로 상기시키며, 그것을 전체 상황에 적용합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과 내가 해야 하는 어떤 일인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다른 그리스도인을 사랑하게끔 만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하면 여러분들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스스로"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이라는 진리를 상기시켜야 합니다.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문제 가운데 나타나는 어려움이란 항상 다른 사람을 볼 뿐 결코 자신을 보지 않는 데 있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면 하나님이 '나를 그토록 사랑하셨다면‘ 내가 무엇을 발견하겠습니까? 대체로 나는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본능적으로 느낍니다. 나는 문제를 일으키는 자가 다소 변화될 수만 있다면 아무런 어려움도 없을 것이며 모든 것이 잘되고 서로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 잠시만 멈추고 너희 자신을 보고 너희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스스로 정확히 상기시키라. ”라고 합니다. 복음은 우리가 우리 속에서 이 모든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자아와 곧장 대면하도록 이끕니다. 요일 4:9-10절에 “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달리 말해 나는 우리가 본성상 죄와 허물로 죽어 있으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옛사람과 옛 상품이 여전히 우리 가운데 있다고 하는 점을 다시금 생기 시키고자 합니다. 그 옛사람과 옛 성품은 자아라는 단어로 묘사될 수 있습니다. 자아가 이 모든 문제를 일으킵니다. 자기 의지, 자기 사랑, 자기 심화, 자고 함 등이 문제입니다. 자기 사랑은 그 모습을 다음과 같이 드러냅니다. 자기 중요성. 자기 확신, 자기기만, 자기 추구, 자기 연구, 자기 과민, 자기방어, 자기만족, 자의식, 자기의, 자기 영광 추구 등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타락과 죄의 결과이며 죄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자신을 보고 자신을 주시하며 자신을 살피고 항상 자신만 생각합니다. 자기를 확신하는 사람은 자신을 주창하며 자신이 바라는 바를 얻으려고 합니다. 자기를 기만하는 사람은 얼마나 쉽게 자신을 변호하며 다른 사람들의 같은 모습에 대해서는 얼마나 쉽게 정죄합니까? 자신에 대해 너무도 관대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금하면서도 자신이 그 일을 하면 별로 문제시하지 않습니다. 자기 연민에 빠진 사람들은 " 왜 사람들이 나를 이처럼 대할까? 나는 아무런 해악도 끼치지 않았다. 내게는 전혀 잘못이 없다. 왜 사람들이 그토록 까다로울까? 나는 곤경에 처해 있으며 그것은 사실 정당하지 못하다.”라고 말합니다. 자기 과민에 빠진 사람은 너무도 과민하며 너무도 쉬게 상처를 받으며, 곤경과 공격을 당하고 있다고 상상하고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도 그린 것처럼 생각합니다. 참으로 지긋지긋한 과민반응입니다. 자기 방어적인 사람은 항상 방어적이며, 사람들이 불쾌해지기를 바랍니다. 자의식...…… 오, 자기로부터 벗어나자! 롬 :2"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내가 항상 생각하고 있는 이 곤고하고 추한 자아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성령에 의해 죄를 깨달은 모든 사람의 부르짖음이 아닙니까? 9절과 10절로 그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기독교 신앙의 원칙들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세상 안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도록 만들지 않고 여러분이 이와 같은 자아의 표현들을 볼 수 있게끔 조명해 주지 않는다면, 그것들을 지키려고 노력해 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그런 역할을 합니다. "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그것이 사랑이라고 요한은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 모든 것을 믿고 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보게 합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는 순간 존 번 연의 다음과 같은 탄성에 공감할 것입니다. ” 아래에 처한 자는 추락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으며, 낮아지는 자에게는 교만이 없다. “존 번연의 말은, 내가 나의 실제 모습을 보건대 누군가가 나를 모욕하기란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들은 나의 나쁜 점을 충분히 지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나에 관해 무슨 말을 하든지 내가 나를 알고 있을 때는, 나는 그들이 나에 관한 진실을 제대로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광스러운 복음의 조명 안에서 자신을 진정으로 바라볼 때, 그 누구도 우리를 해치거나 우리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티끌 속에 있는 자신을 보며, 너무도 낮아져 있으므로 아무도 우리를 더 낮은 곳으로 보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보았을 때, 문제의 75%는 이미 해결된 셈입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 위에 설 때 그들을 내려다봅니다.. 하지만 티끌 가운데 엎드리고 있을 때, 꼭 다른 사람을 올려다보아야 하며, 그렇게 할 때 상황과 관점이 곧 달라집니다. 이것을 요약해 봅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서 작용하고 있을 때, 이 복음을 믿고 그 사랑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할 때, 상대방이 하는 일보다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럴 때 이런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절반은 해결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들이 하는 일을 봅니다. 우리는 그들을 보지 않습니다. 이제 복음은 우리가 그들을 영혼으로 객관적으로 보게 하며, 행위를 통해 혹은 그들이 우리에게 행하고 있는 바를 통해서만 보지 않게 합니다. 내가 보는 것은 죄의 희생자요 사탄의 희생자입니다. 복음은 내가 그 사람의 행동과 그 이면에 있는 자신을 구분할 수 있게 해 줍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셨을 때 우리에게 하신 일이 바로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땅 위에 있는 우리를 하늘로부터 내려다보셨으며 우리의 비참한 행위들을 보셨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실 수 있었습니까? 물론 그 대답인즉 하나님이 죄인과 죄를 구분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행동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영혼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의 행한 바를 보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분은 “ 내가 구원하기 원하는 영혼이 있다. ""라고 하십니다. 여러분과 내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고무될 때, 우리 역시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그들에 관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 가련한 사람들, 그들은 단지 죄와 사탄의 희생자들뿐이며, 그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을 움켜잡고 있는 자는 이 세상 신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 안에 있는 이 더러운 궤양이다. 그것이 문제다. "우리 역시 죄인에게 그와 같이 처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의 이면에 있는 영혼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들처럼 죄와 사탄에게 순응하는 사람들을 보아야 하며, 그렇게 할 때 그들을 긍휼히 여기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듯이,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 하나님, 그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것이 그들 안에 있는 사탄과 죄임을 압니다. 주님을 나타내사 그들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소서. ”라고 한다.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는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떻게 형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다음 단계는 우리는 서로 영광의 공동상속자들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동료 순례자들이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들이요. 같이 더불어 천국으로 들어갈 같은 아버지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 안에서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이런 진리를 묵상하면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마태복음 18장의 비유 23-35절에서23-35 우리의 복되신 주님이 친히 이 진리를 완벽하게 제시하셨습니다. 자신의 종들과 회계하려 하는 어떤 임금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일만 달란트라는 거금을 빚진 자를 찾았습니다. 그 가난한 종은 이 빚을 갚을 능력이 없었으며, 주인은 그를 자기 처자식과 함께 감옥에 가두라고 명했습니다. 하지만 그 좋은 무릎을 꿇고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주인에게 간청했습니다. 결국 그는 “제게 시간을 주십시오. 그리하면 모두 갚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주인이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고, 종은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그 종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진 사람을 만나 "내게 진 빚을 갚으라. ”고 말했습니다. 그 가난한 채무자는 “ 당장은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면 다 갚겠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종이 그에게 " 너는 그 모두를 지금 갚아야 한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그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주인이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이 불의한 종을 책망하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니까?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처럼 하시리라.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첫 번째 종이 자기 주인에게 빚진 액수인 일만 달란트는 그가 가신이 탕감해 주기를 거부한 백 데나리온보다 무려 사십만 배가량이나 더 큽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친히 묘사하신 내용입니다. 그것은 이렇게 해석됩니다. " 내가 하나님께 진 빚은 무한하다. 그분이 내게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신다면, 어떻게 내가 훨씬 더 적은 사십만분의 일의 액수인 다른 어떤 사람의 작은 빚을 탕감해 주기를 거부할 수 있겠는가? ”주님은 더 나아가 그토록 많이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를 깨닫는 사람들은 용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을 그처럼 깨뜨리시므로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그토록 큰일을 하셨으므로 그들도 다른 이들을 위해 똑같이 해야 합니다. "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주지하다시피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 하나님이 이같이 사랑하사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보내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무덤으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과 관련된 어떤 일을 하셨고 그리하여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 성가신 사람과 관련해 무엇인가를 해야 합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고 도와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그런 사람들을 정죄하고 그들을 불가하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해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셨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러하셨듯이,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 나 자신이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으면 반드시 그러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다시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보았습니까? 그러하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본 자입니다.. 여러분의 자기 의는 모두 추방되고 사라집니다. 그리고 자신을 그와 같이 볼 때, 다른 사람들 역시 소위 죄라고 불리는 무서운 세력의 희생자임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그들을 자유로워지도록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어나 행하십시오. "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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