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요 13:1-8
2. 본문 요약: 십자가를 앞두고 주님은 성만찬 식을 가지신 후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
3. 주제: 섬김(사랑)
4. 테마: 섬김의 방법
5. 명제: 주님의 섬김은 우리가 배워야 할 영원한 사랑 방법이다.
6. 설교 목적: 더럽고 추한 제자들을 끝까지 섬기시는 방법을 통해 주님의 크신 사랑을 배워 실천하도록 돕기 위해서
7. 질문제기: 예수님을 제자들을 어떻게 섬기십니까?
8. 전환 문장: 주님의 섬김은 우리가 배워야 할 영원한 사랑 방법이다. 예수님을 제자들을 어떻게 섬기십니까?
9. 대지
10. 제목: 무릎 꿇는 사랑
신앙생활은 섬김의 생활입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주님이 우리를 섬기는 생활입니다. 오늘 말씀은 십자가를 앞두고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이어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는 세족식 장면입니다. 14~17절에서 “내가 너의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여 본을 보였노라 너희가 이것을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교회에서는 세족 식을 잘하지 않습니다. 가톨릭의 세족식을 통한 미신적인 가르침 때문에 종교 개혁주의자들은 그렇게 크게 장려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냄새 나는 발을 일일이 물로 씻고 수건으로 닦아 주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에 대한 사랑 즉 섬김의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더럽고 추한 제자들을 끝까지 섬기시는 방법을 통해 주님의 크신 사랑을 배워 실천하도록 돕기 위해서 이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먼저, 고통 가운데서의 사랑입니다.
1절을 다 함께 봉독합시다. 1절“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주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고통 가운데서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런 줄 아시고.” 사람이 고통이 있으면 자연적으로 자아 중심적이 됩니다. 아픈 자신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짜증만 납니다. 자신만 생각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모든 것이 귀찮습니다. 평소 주님은 제자들을 의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에게 부탁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너희들 나를 위해 기도 좀 해요, 그렇게 부탁을 합니다. 참으로 힘든 부탁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마 26 : 40절 “그자는 것을 보시고” 제자들은 주님의 고통과 아픔을 조금도 모른 체 코를 골면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어느 제자도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라” 주님은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끝까지라는 말을 시간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정도에서도 최선을 다한 사랑이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최선을 다해서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다음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심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니다.
주님은 가룟 유다의 배신을 알고서도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은 가룟 유다의 배신을 끝까지 막고자 애셨습니다. 예수님은 21절에서 공개적으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가룟 유다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가룟 유다의 마음을 다 아시고 계신 주님은 공개적으로 가룟 유다가 뉘우치도록 촉구하신 사랑의 음성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주님의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서로 의심합니다. 주님을 배신할 자가 누구야! 서로 수군거리며 의심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가장 사랑스러운 제자 요한이 주님에게 주님, 그자가 누구십니까? 조용히 물었습니다. 26절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자라 말씀하시며 가룟 유다에게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말씀하셨지만 다른 제자들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끝까지 가룟 유다가 회개하여 주님 앞으로 돌아오도록 사랑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주님의 사랑을 외면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가룟 유다는 주님! 다 아셨군요. 나는 배신자였습니다. 회개합니다. 용서해 달라고 주님 앞에 엎드렸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사랑의 음성을 듣고 27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 지라.” 회개를 거부하자 마귀가 유다의 마음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지 않으면 반드시 마귀의 제자가 됩니다. 그리고 30절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라.” 그러나 여러분, 가룟 유다만 주님을 배신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다른 제자들도 주님이 체포당하시자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특별히 나는 죽을지언정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하면서 큰소리쳤던 제자들의 리더였던 베드로는 나는 예수를 모른다 저주하며 부인했습니다. 모두가 주님을 배신했습니다. 주님은 최고의 사랑을 베풀었는데도 배신당했습니다. 가룟 유다도 베드로도 똑같이 주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그 후의 삶은 180도 다릅니다. 무엇이 이 두 배신자의 삶을 차이 나게 했을까요? 가룟 유다는 주님의 사랑의 손길을 외면하고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러자 30절 “나가니 곧 밤이었더라.” 가룟 유다의 삶은 밤, 어두움, 지옥이었습니다. 그리고 곧 후회하고 자살을 택했습니다. 주님은 가룟 유다를 향해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을 이라고 평가하셨습니다. 베드로로는 어떻게 했습니까? 자신을 믿고 큰소리치던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닭이 울기 전에 3번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따끔하게 경고하셨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이 체포당해 심문을 받으시고 계신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 예수님이 어떻게 되시는지 살피기 위해 몰래 잠입했다가 그 집의 한 여종 계집아이가 너도 예수와 한편이라는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고 겁에 질려 “나는 예수 같은 인간을 모른다. 저주하며 부인했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뒤를 돌아보셨던 주님의 눈과 마주쳤고, 바로 그 때 어디선가 꼬끼오하는 닭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밖으로 뛰어나간 베드로는 통곡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주님, 죄송해요, 나는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나를 용서해 주세요. 그 후 베드로는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지고 순교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도 여전히 주님의 제자로서 귀한 믿음의 조상으로 존경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회개가 이렇게 인생을 차이 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셋째는, 더러운 가운데서도 사랑하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고대 중동 지방에서는 샌들 형식의 신발을 신었고 서민들 가운데서는 아예 신발을 신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외출하고 들어오면 발은 온갖 먼지, 오염, 냄새로 가득 차 더러워졌습니다. 주님은 이런 환경 가운데서도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주님은 죽으심을 앞두고 마음이 심히 괴로운 가운데 있었지만, 제자들은 서로 자신들이 더 크다고 다투는 자기중심적인 제자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 앞에 왔어. 주님, 우리가 구하는 것 주십시오.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면 하나는 주님의 우의정, 다른 하나는 좌의 정으로 해 주세요. 다른 제자들을 이들의 말을 듣고 두 형제에게 분기탱천했습니다. 자신들보다 높아지려고 아양을 떨고 있는 야고보와 요한의 모습이 역겨웠습니다. 주님은 이런 제자들의 추한 모습 가운데서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 아시고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저놈은 안 되겠다. 싹수가 노랗다. 나는 아예 포기한다. 인간은 변하지 않아. 이렇게 쉽게 얼마나 판단을 잘하는지요.. 그런데 나를 바라보십시오. 아니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이라는 자들의 실체를 정확하게 보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어떤 선한 모습 재능 은사가 있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금까지 사랑하시고 인도하셨다고 생각합니까? 착각 아닙니까?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인도로 약속의 땅 가나안에 와서 살다가 물이 부족하니 이집트 땅으로 이주를 합니다. 당시는 목축 시대니 물이 없으면 풀이 자랄 수 없고 목축을 키울 수가 없습니다. 생존의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이집트 땅으로 가니 이집트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를 힐끔힐끔 쳐다봅니다. 사라는 굉장히 미인이었다고 성경은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아브라함에게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자기 부인을 빼앗아 가기 위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그래서 사라에게 여보, 이집트 사람들이 물으면 당신이 내 동생이라고 해요. 잘못하면 내가 죽을 수 있으니 그렇게 합시다. 얼마나 비겁합니까? 이런 인간이 아브라함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한통속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소문을 들은 이집트 왕이 많은 양과 낙타를 아브라함에게 주고 사라를 첩으로 궁전으로 데려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입도 뻥 것 못합니다. 겁쟁이지요.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갑자기 왕의 궁전에 재앙이 돌았어요. 놀란 왕이 원인을 알아보니 사라를 데려 온 이후로 이런 일이 일어났으며 알고 보니 사라는 아브라함의 부인이라는 것입니다. 왕이 당장 아브라함을 불러 너는 왜 거짓말을 했느냐? 예, 내 아내라고 한다면 나를 죽일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왕은 당장 당신 부인을 데려 가시요. 어느 신학자가 이렇게 주석을 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불신자 앞에서 개망신을 당한 사건이라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이라는 죄인을 부르셔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구원 계획을 세워셨는데 만약 사라를 빼앗기면 아브라함을 통한 약속의 자녀는 생길 수 없을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차질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사건에 간섭하신 것입니다. 궁전에 큰 재앙을 주어 사라를 석방 시키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섭리요 사랑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격이 출중해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연약한 죄인을 부르시어,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택한 그의 백성을 버리시지 않습니다. 그의 자녀를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시고자 끝까지 포기하시지 아니하시고 인도하시고 먹이시고 돌보시고 계시는 사랑이 우리 주님의 사랑이십니다. 이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주님처럼 믿음 없는 추한 사람도 인내하며 사랑하게 됩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하셨을습니까?
마지막은 더러움을 변화시키는 사랑입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가룟 유다는 주님의 최선의 사랑을 받았지만, 주님을 배신했습니다.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참사랑을 많이 베푼 사람들이 결국 변화되지 않고 주님을 떠나는 경우를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참으로 실망이 절망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절대 실망하지 마십시오. 우리 주님도 제자 양육에 100%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가롯 유다를 보십시오. 바울 사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위대한 능력의 사람 바울의 가르침을 받고도 믿음을 배반한 갈라디아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다가 실망하지 마십시오. 살 후 3:13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왜요, 하나님은 결국 협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은 악을 변화시켜 선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대 유대인의 식사 풍습은 비스듬히 누워서 먹고 마셨습니다. 성만찬은 비스듬히 누워서 떡을 떼고 잔을 마셨습니다. 그 식사 후 옆에 있는 제자들의 발을 씻으려면 반드시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주님은 그들의 발을 씻기 위해 무릎을 꿇어서 야만 했습니다. 빌 2장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가 되셨다고 말씀합니다. 거룩하신 죄 없으신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종이 되어 오셨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통하여 죄인이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영생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추하고 더러운 모습을 보시고 너는 안 되겠다. 포기하셨더라면 우리 가운데 탈락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고통 가운데 우리를 섬기십니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더러운 가운데서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섬김은 나의 더러움을 변화시키는 사랑입니다. 섬기기 위해에서는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섬기기 위해 종이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처럼 무릎을 꿇고 섬기면 예수님을 더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더 닮아가게 됩니다.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의 힘으로 즉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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