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갈 3:1-5
2. 제목: 오직 믿음으로 받는 성령
갈등: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마그나 카르타 즉 헌장으로 불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그 결과 자유를 누리게 되었음을 갈라디아서는 강조합니다. 그런데 유대인 거짓 교사들이 이 자유를 율법의 종으로 만들고자 유혹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행위를 통해 구원을 얻겠다는 거짓 복음을 버리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의 정당성을 변호하기 위해 이 갈라디아서를 AD 49-56년경 기록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행 13장에 나오는 일차 선교 여행 중 바나바와 함께 갈라디아 교회를 개척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떠난 후에 유대인 거짓 교사들이 교회에 들아와서 갈라디아 교회를 거짓 복음으로 유혹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두가지 이유로 바울 사도를 반대했습니다. 첫째는 바울 사도의 사도성을 의심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12제자가 아니기 때문에 사도가 아니라라는 주장입니다. 이들의 주장에 대해 바울사도는 강력하게 반박을 합니다. 1:1절”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바울 사도는 행 9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적적으로 만납니다. 예수 믿기전 바울은 예수를 이단으로 생각하고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골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어느날 다메섹에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가는 도중 행 9:3-5절“:39:3-5절“: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행 9:4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행 9:59: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직접 보고 복음을 듣고 배훈 사도임을 변호합니다. 이 경험후 14년 만에 예루살렘을 방문 후 교회의 기둥이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만나 교제헸습니다. 갈 2:9절“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2제자 가운데 중심인물인 베드로 야고보도 요한도 바울의 은혜의 복음을 인정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바울이 사도가 아니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은 부족하다 그래서 믿음에다 할례를 보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유대인 거짓 교사들은 바울을 전부 반대한 것은 아닙니다. 그의 가르침 즉 복음에 율법을 보충하려고 했습니다. 반대자들은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요구와 그리스도인의 삶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 율법의 최소한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참된 거룩함을 위한 율법주의적 생활 방식을 결합하여 의의 의미를 온전하게 성취 하도록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어떤 형태의 보충도 허용될 수가 없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1장에서 결렬했지만 절제하면서 신중하게 그들을 설득했지만 3장에 왔서는 신랄하면서 모욕적인 말까지 사용하면서 그들을 ”누가 너희를 꾀드냐?“ ”어리석도다 “어리석도다 ”과연 헛되도다 “라고“ 분개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말들은 갈리디아 교인들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교인들의 영적인 안목의 부족함에 대해 분노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악한 자의 눈에 현혹되었습니다. 사탄의 시험에 참 진리를 잃어버린 어리석은 길을 갔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유산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에 의한 구원에서 행위 구원으로 넘어가려고 합니다. 샘에서 터진 웅덩이로 변질 되어 갔습니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인간의 행위로 마무리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2. 갈등 심화: 내가 알기를 원한다.
2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 바울 사도는 두 가지를 대조하면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설득을 시도합니다.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인간 행위로 구원을 얻겠다는 그들에게 3절에서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 책망을 하시면서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 처음 예수를 나의 하나님과 구주로 믿을 때 성령을 받습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중생하여 구원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제 믿음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로,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얻게 다고 하니 4절에서 ”너희가 이 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참으로 헛된 일을 하는구나라고 신랄하게 책망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회개를 촉구하는 바울의 애정과 희망을 끊지 아니하는 목자의 심정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경험에 호소를 합니다. 첫 번째는 두 가지 확실성에 호소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갈라디아교인들의 신앙과 생활 방식에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갈 2:21“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라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십자가에 못 막힌 예수가 그렇게 전파되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도 전파되어 의심 없이 진리의 복음으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1절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바울 사도를 통해 처음 들으셨을 때의 십자가 감동이 지금도 눈앞에 보이듯이 분명하게 살아 있지 아니하냐라고 반문합니다. 바울 사도는 복음에다 무엇을 보충한다는 것은 결국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기독교와 유대교와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갈라디 어서입니다.. 오늘날에도 의식주의, 도덕주의 삶, 과학적인 성취, 재정적인 성공, 지적 달성, 육체적인 매력, 교리적인 자유 이런 것에 구원의 기초를 두는 것이 바로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겠다는 육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행위를 의지하는 육은 예수 그리스도가 없습니다. 구원의 소망의 근거가 사라집니다. 갈라디아 인들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의 수단에 의존하여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시도를 했습니다. 이들은 유대주의 자들의 권면을 받아들여 율법주의자로 변형되었습니다. 엄격한 규례를 행하고 유대인처럼 할례를 행하고자 했습니다.. 이것들을 통해서 자신들이 완전하게 될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자입니까? 아버지 집을 떠나 집 나간 탕자가 연상되지 않습니까? 아버지 집안에는 안정, 평화, 사랑, 이해가 있었습니다. 이 아버지 집을 버리고 이 상한 땅에 가서 적대적인 환경 가운데서 어스렁거리며 굶주림과 결핍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는 육은 의심, 두려움, 어두움, 연약함, 궁핍, 패배가 만연한 곳입니다. 유대인 거짓 교사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믿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세의 율법주의로 변질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니 어리석은 갈라디아인들 이라고 절규하는 바울의 음성을 들으 보십시오..
3. 전환: 믿음의 결과?
처음 그리스도의 사랑의 복음을 듣고 믿을 때 성령을 받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성령의 내주 하심으로,, 믿음을 심어줍니다. 죄용서와 하나님의 자녀 됨의 의식을 갖게 합니다,, 자유, 기쁨, 구원의 확신, 그리고 신자의 삶의 현장에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새 삶 즉 믿음의 생활은 성령을 받는 것과 같이 갑니다. 예수 믿을 때 내 안에 오신 성령은 사탄의 능력에 대항할 능력을 주십니다, 기도 응답을 누리게 됩니다, 효과적인 증인의 삶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도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기쁘시게 했습니다. 창 15:4-6절“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창 15:5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 15:6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료 여기시고” 믿음의 조상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분명하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창세기 17장에서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를 행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입니다. 그 후에 할레가 시행된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구원을 얻기 위해 또 다른 인간의 행위를 더 보충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구원은 은혜로 받지만 구원받는 후의 삶과 성령 충만은 나의 노력과 경건함으로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성령을 받는 것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이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아니요 라는 바울의 탄식을 기억하십시오. 교회 부흥의 역사를 살펴보면 사람들이 경건하게 거룩하게 살았기 때문에 그 공로에 대한 하나님의 상으로 부흥의 역사를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연약한 몇몇 사람들이 영적으로 기진 맥진한 가운데 다만 주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자백하며 자신들을 새롭게 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성령의 불을 던져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그 자체가 큰일입니다. 마 5;6절“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성령 충만은 힘이 있고 경건하고 거룩하고 순종하는 사람들 가운데만 임하신 것이 아니라 억망으로 살았고 연약했고 부족했지만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그곳을 주님은 외면하시지 아니하시고 성령을 허락하셨습니다. 부흥은 성령의 강력한 선물입니다. 은혜는 자격 없는 자들에게 무조건적으로 주님이 허락하신 하늘의 선물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의 글에 “최근에 성령 충만한 받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의 행위를 요구하고 있다.”라고 비판적인 글을 남겼습니다. 금식기도하고 철야하고 경건하게 사는 곳에만 성령을 충만히 주신다는 생각을 재고해야 합니다. 물론 이런 행위 자체를 결코 나쁘다고 폄하하는 말이 아닙니다. 전 고신 대학원의 김영돈 교수는 성령 충만은 실패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 성령 충만입니다. 5절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 받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능력을 행하십니다. 율법의 행위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감동하여 믿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이 성령 충만을 주실 것입니다.
4. 대단원: 어떻게 성령이 일을 하십니까?
1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에 밝혀 보이시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 먼저 성령님은 영적으로 우리 영혼 속에서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보고 느끼게 하십니다. 성령은 은사를 주시는 분이시지만 먼저는 십자가 즉 예수님을 보여 주십니다. 성령님은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십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성령 충만한 사람은 성령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 많이 이야기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요 14:26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 성령님은 예수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을 말씀하십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떤 일을 하시는지,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성령 충만을 원하십니까? 예수님께 집중하십시오. 예수님의 말씀 성경을 듣고 믿고 순종하십시오. 또 성령님은 롬 8:27절“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쉽게 분노 잘하시는 분 안 계십니까? 분노하면 안 돼 자신의 의지를 발동하여 억누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지 보여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거룩하신 하나님이 사기꾼과 같은 나를 이토록 사랑하신다는 깨달음이 내 마음에 감동으로 다가오면 분노는 서서히 사라집니다. 내가 긍정적인 마음을 가진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못밖히신 예수님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성자 하나님이 자기 생명의 피를 흘리심으로 나를 사셨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나도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예수님이 부활할 때 나도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셨다는 이 놀라운 은혜를 보여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손해 본 것 때문에 슬프 하시는 분 안 계십니까? 찬송가 341장“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갑니다.. 이제부터 예수로만 나의 보배 삼겠네 세상에서 부귀영화 모두 잃어버려도 주의 평안 내가 받고 영생 복을 받겠네 ““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나에게 감동이 되고 깨달아지면 내가 손해 본 것은 손해가 아니라 아직도 내 생명을 주셨고 주님 안에서 나는 참으로 부유한 자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베푸신 사랑을 믿고 그분이 하신 말씀에 순종하며 믿음으로 나아가십시오. 성령님이 함께 하사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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