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마 26:36-38
2. 명제: 주님의 순종으로 죄인이 구원을 얻게 됩니다. 선언적 명제
3. 제목: 주님의 순종
1. 갈등: 십자가에 죽으심
팀 켈러 목사님의 글을 편집하여 올립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보내신 시간은 제자들의 나약함을 보여 주는 좋은 예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곧 겪게 될 일에 대하여 알지 못했습니다. 본문은 예수께서 왜, 어떻게 죽임 당하셨고,, 우리는 그것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밝히 보여 줍니다. 마: 26:36-38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마태에 따르면 그분은 나머지 제자를 두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고 동산 쪽으로 기도하러 가실 때부터 37절“고민하고 슬퍼하셨다”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러 가시던 길에 예상 밖의 암흑과 섬뜩함이 예수 님을 덮쳤고, 그 고통으로 인해 그 자리에서 주저앉으신 것만 같았습니다. 누가의 기록에 보면 기독교 지도자 스데반은 자신을 처형하는 무리 앞에서 행 6:15“6:15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빛났다.” 행 7:60“그는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이들을 용서해 달라고 온유하게 기도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사자 밥이 되면서도 찬송을 멈추지 않았고, 화형을 당하면서도 손을 들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그분을 따르던 이들과 다르게 죽음에 대해 반응하셨습니다. 얼굴이 천사처럼 빛나지도 않으셨고, 담담하거나, 초연하거나 평온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님이 죽음을 앞두고 그렇게까지 강도 높게 고뇌와 슬퍼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답은 그분의 죽음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런 죽음에 직면한 사람은 역사상 전무후무합니다. 마태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태와 마가와 누가는 모두 이 ‘잔'을 그날 밤 예수께서 하신 기도의 핵심으로 언급합니다. 성경에서 '이 잔'은 불의와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사법적 진노를 의미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이후의 순교자들보다 고상하게 죽음을 대면하지 못하신 이유는 그들 중 누구도 이 잔을 마시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친히 이 잔을 언급하신 것으로 보아 그분은 자신이 육체적 고문과 죽음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악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를 받게 되심을 아셨습니다. 우리가 당해야 할 하나님의 사법적 진노가 예수 님께 임한 것입니다. 이 진노가 남김없이 다 부어진 것은 이튿날 십자가에서 있지만, 그때 그분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이 사법적 진노는 과연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바로 사랑하는 성부 하나님의 부재라는 것이었습니다.
2. 갈등심화: 최후의 고난을 앞둔 예수 님의 싸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다른 어느 인간의 죽음과도 달랐습니다. 그분은 인간이기 때문에 성부 아버지와의 완전한 교제를 잃으셨습니다. 또 우리를 대신해 하나님의 사법적 진노를 감수하셨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것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최후의 고난을 앞두고 그리스도의 영혼 안에 벌어진 싸움은 모든 표현과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처절했습니다." 오랫동안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을 수동적 측면과 능동적 측면으로 구분했습니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예수 님은 수동적 순종을 통해 우리 몫의 형벌을 당하시고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능동적 순종을 통해서는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 님이 십자가에서 친히 담당하신 죄의 형벌은 본래 우리 몫이었습니다. 결코, 그분의 몫이 아니었습니다. 이를 전통적으로 '수동적 순종’이라고 칭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불순종한 것은 우리인데 예수 님이 대신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예수 님을 믿는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해 정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예수 님이 행하신 일이 거기서 그친다면, 우리는 과거의 죄 때문에 벌을 받지 않아도 되어서 감사할 수 있고 하나님이 더는 노하지 않으실 테니 크게 안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실제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는 아직 찾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벌하지 않는다는 것이 곧 자식을 사랑하고 기뻐한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 님이 수동적으로 형벌을 감수하신 것만이 우리에게 행하신 전부가 아닙니다. 생애 전체, 특히 죽음을 통해 하나님 율법의 적극적 요구를 충족시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님의 ‘능동적 순종'입니다. 예수 님은 우리를 대신해 죽으셔서 율법의 저주를 당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야 했을 사랑과 순종의 위대한 삶을 사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게 하십니다. 예수 님 외에는 누구도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고, 완전하고 희생적으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지도 못했습니다. 그 예수 님은 수동적으로만 아니라 능동적으로도 우리를 대신 하나님의 율법을 충족시키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 몫의 처벌을 당하시고 우리는 그분 몫의 상을 하나님께 받습니다. 그야말로 놀랍도록 철저한 구원이니 곧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에드워즈가 상상했듯이 예수 님이 제자들 쪽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해도 온전히 정의롭고 정당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분께 가장 절실히 지원이 필요했던 그 시간에 아예 깨어 있지도 못했으니 말입니다. "그들은 영영 내게 보답할 수도 없는데, 영원 전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누리며 살아온 내가 왜 그들을 위해 이런 풀무 속에 뛰어들어야 하나이까? 그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원수인데 왜 내가 그들을 위해 하나님의 진노에 눌려 순순히 죽어야 하나이까? 그들은 나와 연합할 자격이 없을뿐더러 내 눈에 들 만한 일을 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니이다." 그렇게 말씀하셨어도 얼마든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분은 하나님께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아뢰셨습니다. 에드워즈는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그분은 슬픔이 넘쳤으나 사랑이 훨씬 더 넘쳤다. 그리스도의 영혼은 비탄의 홍수에 잠겼으나 이 비탄은 죄인을 향한 사랑의 홍수에서 비롯되었다. 그 사랑이 그분의 마음에서 세상으로 흘러넘쳐 죄의 산꼭대기까지 뒤덮기에, 충분했다. 땅에 떨어진 굵은 핏방울은 그리스도의 마음에 바다처럼 넘치는 사랑의 표준이었다."
3. 전환: 우리가 찾던 참사랑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동산에 두시고 선악과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나무에 대한 내 말에 순종하라, 그러면 너희가 살리라. 순종하면 복을 주리라”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불순종했습니다. 이제 여기에 다른 동산과 둘째 아담과 다른 명령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십자가도 나무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명령은 만인에게 주시는 모든 명령의 원형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그분은 항상 "나에게 순종하면 복을 주리라. 내가 너희와 함께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 예외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을 통틀어 오직 예수 님께만 그분이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첫째 아담에게는 "나무에 대한 내 말에 순종하라. 그리면 복을 주리라고 하셨는데 아담이 순종하지 않았다. 그러나 둘째 아담에게는 나무에 대한 내 말에 순종하라. 그러면 네가 죽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 님은 말씀에 순종하십니다. 예수 님은 순종의 결과로 저주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인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사실상 "나에게 순종하고 충성하면 내가 너를 버리고 외면하여 네 영혼을 지옥으로 보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예수 님은 순종하셨습니다. 아버지께 버림받고 죽어 가실 때도 예수 님은 그분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 님은 우리 몫의 죽음만을 당하신 게 아니라 우리가 살았어야 할 삶까지도 사셨습니다. 예수 님을 믿는 사람은 그분의 죽음으로 인하여 죄 사함만 받는 게 아니라 순종의 혜택까지 입습니다. 희생뿐 아니라 의까지도 우리에게 전가된다는 뜻입니다. 고후 5:21 절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대언자이신 그분 안에서 순종하는 의인으로 보십니다. 예수 님의 죽음을 우리의 죽음으로 보시듯이 그분의 행위도 우리의 행위로 보십니다. 예수 님이 행하신 일의 아름다움과 위력을 보십시오. 이런 용기와 사랑과 희생에 합당한 명예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믿으면 바로 그 명예가 당신에게 주어집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덕분에 우리는 사면되어 감옥에서 시내까지 이동할 버스비만 받은 죄수가 아니라 사면에다 명예 훈장까지 받은 죄수와 같습니다. 그 훈장에는 각종 권리와 혜택이 수반되었습니다. 용서와 해방만이 아니라 사랑과 즐거움까지 주어졌습니다. 바로 예수 님이 능동적으로 순종하신 결과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평생 온전한 삶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시고도 그 능동적 순종 때문에 여기 동산에서 엄청난 도전에 부딪히셨습니다. 그래서 그 도전에 대한 예수 님의 아름다운 반응을 보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당할 일을 대신 당하신 예수 님을 보며 어떤 도움을 얻습니까? 첫째, 동산의 예수 님은 비할 나위 없는 정직의 표본이십니다. 그분은 보는 이 없는 어둠 속에서도 옳은 길을 가셨습니다. 역사상 가장 힘든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음을 아시면서도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곧 날이 밝으면 많은 사람 앞에서 하실 일을 홀로 어둠 속에서 하셨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당신은 어둠 속에서나 빛 가운데서나 똑같은 사람입니까? 홀로 있을 때나 남들 앞에서나 똑같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이중생활을 합니까? 둘째, 예수 님은 기도의 위대한 모형입니다. 예수 님의 가장 놀라운 점은 자신의 감정과 갈망에 대해 솔직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복 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경건한 척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 번이나 아버지께 차라리 구원 계획을 피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꾸밈이나 숨김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주저 없이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아뢰십니다. 기도의 기본 취지는 하나님의 뜻을 굽혀 내게 맞추는 게 아니라 내 뜻을 빚어 그분께 맞추는 데 있습니다. 예수 님은 철저히 하나님 중심이면서도 지극히 인간적이고 솔직하십니다. 당신도 이것을 기도의 지침으로 삼으십시오. 셋째, 여기 동산에 사람에 대해 인내하는 본보기가 있습니다. 마태의 기록에는 예수 님이 제자들에게 돌아와 마 26:40절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반문하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한 인간으로서 마음이 몹시 무거워 친구들에게 약간의 지원을 부탁하셨건만, 와 보니 그들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온통 실망하신 중에도 그분은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마 26:41“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너희가 나를 실망하게 했으나 나는 너희의 선의를 아노라"라는 뜻입니다. 깊은 고뇌 중에도 제자들을 인정해 주십니다. 그날 밤 제자들이 잘못한 행동이 수두룩한데도 요 13:1절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렇듯 예수 님은 어떻게 살아가고, 기도하고, 사람을 대할 것인가에 대한 훌륭한 모범을 보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이 모범일 뿐이라면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너무 선하셔서 아무도 그 기준에 부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님은 단지 모범이 되려고 오신 게 아니라 구주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내면을 변화시켜 느리지만, 확실히 자신의 형상을 닮아 가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말씀만 하시는 게 아니라 그렇게 살아갈 능력을 주십니다. 역설이지만 그분을 모범이 아닌 대속물로 보아야만 우리는 오히려 능력을 입어 그 모범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4. 대단원: 대속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어떻게 그리스도를 대속물로 볼 수 있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이 모든 일을 주님은 모범이 아닌 대속물로서 당신을 대신해 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곧 나와 가장 깊게 관계합니다. 거기서 새 힘을 얻어 당신도 무력한 자기 연민과 우유부단함에서 벗어나 시련에 맞설 수 있습니다. 예수 님의 코앞에서 잔을 들고 "이 사람들을 위해 정말 이 잔을 마시려느냐"라고 물으시는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에 예수 님은 예라고 답하십니다. 이제 당신도 ”내가 이런 잔이나 마시고 있다니 “자신이“ 처량하게 느껴질 때마다 이렇게 자신을 다독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것은 예수 님의 잔과는 전혀 달라! 그분이 하신 일에 비하면 내가 겪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서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 주님은 저를 위해 무한한 고난도 참으셨습니다. 그러니 저도 이런 고난쯤은 주님의 은혜의 힘을 입어 당연히 주님을 위해 참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라는 가르침은 당신의 낮은 자존감에 변화를 가져와 새로운 안정과 균형을 갖게 합니다. 예수 님은 당신을 사면하셨을 뿐 아니라 '명예 훈장’까지 달아 주십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용서받은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아름답고 그분 안에서 의롭다고 칭함을 받습니다. 이제 당신을 향한 비판이나 실패에 어떻게 반응할 것입니까? 내가 나를 볼 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일이 잘못되고 나서야 후회하며 반성하듯이, 우리는 체면을 살리기 위해 평판과 인정에 집착합니다. 스스로 아름답고 중요하고 의로워져 자신을 입증하려 합니다. 다시 말해서 중요한 짐을 예수 님께 맡기지 않고 스스로 중요하고 고상하게 행동하려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제대로 알면 비난과 실패를 쉽게 이길 수 있습니다. 내가 아는 이들이 이런 말을 하곤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따르겠지만 끝까지 버틸 수는 없을 것 같아. 나 자신을 못 믿겠거든. 그분도 내 실패에 질리실 거야." 부디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 님을 보십시오. 당신을 향한 사랑으로 주님이 무엇을 견뎌내셨는지 보십시오. 예수 님이 고난과 십자가를 피하셨다면 우리에게는 구원이 없고 형벌만 남았을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우주 최악의 일까지 다 감당하시고도 그 사랑은 요지부동입니다. 그런데 그 무엇으로도 당신을 향한 그분의 마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예수 님이 당신을 보시며 "더는 못 참겠구나! 너의 꼴을 보고 그 이상은 나도 못하겠구나!"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그 잔 앞에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 분이라면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 8:38-39" 아무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라는 취지로 말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히 13:5"내가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평생 찾던 사랑이 여기 있습니다. 이 사랑만이 당신을 실망하게 하지 않는 과거에도 현재도 미래에도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이는 친구 관계나 부부애나 연애 감정이 아니라 당신이 추구하는 그 모든 이면에 존재하는 사랑입니다. 이 능동적 순종의 사랑이 당신의 삶에 능동적 실체가 되면 당신은 예수 님처럼 정직한 사람이 됩니다. 기도의 사람이 됩니다. 당신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에게도 친절한 사람이 됩니다. 이 사랑이 있으면 당신도 좀 더 예수 님을 닮게 될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당신을 위해 죽으신 예수 님을 보십시오. 그 사랑에 마음이 녹아 당신도 그분을 닮아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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