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롬 8:1-13
2. 명제: 성령으로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다. 가능성의 명제
3. 제목: 성령으로 죄와 싸우라
1. 갈등: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팀 켐벨 목사님의 글을 편집하여 올립니다. 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여기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이 두 단어는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의 신분을 말해 줍니다. “정죄함이 없나니”는 법률 용어로 갚아야 할 빚이나 받아야 할 형벌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정죄도 받지 않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어떤 흠결도 찾지 않으십니다.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단지 잠시 동안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정죄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우리의 과거, 또는 현재에만 한정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죄를 고백하고 선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그 순간 정죄받지 않는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죄를 지으면 다시 정죄를 받아서 그 상태로 죽을 경우 구원받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옳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늘 정죄를 받았다가 정죄에서 놓임을 반복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글자 그대로 정죄함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1절"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순간, 정죄함은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기쁘게 받아들여질 뿐입니다! '정죄함이 없나니'를 잊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마틴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이 표현에 담긴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데서부터 나온다." 우리가 "이제 정죄함이 없나니”를 잊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우리는 한편으로 죄의식과 자신의 무가치함에 필요 이상으로 큰 고통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필요가 생기고, 비판에 매우 예민하게 되어, 자신을 방어하게 되고, 대인관계에 자신감이 없어지고, 기도와 예배를 통한 기쁨과 확신이 사라질 것입니다. “정죄함이 없나니"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다만 두려운 마음에 억지로 순종합니다. 그러면 사랑과 감사에서 나오는 강력한 동기부여를 결코 경험할 수 없습니다. 다음과 같은 로이드 존스의 비유는 이것을 잘 보여 줍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죄를 짓는 것과 믿는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의 차이는 국법을 어긴 사람과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에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사람의 차이와 같다. 믿는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마치 법을 어기지는 않았지만, 남편과 아내의 마음에 상처를 준 것과 같다. 이것이 다른 점이다. 즉 법이 아니라 사랑과 관계의 문제다. 후자의 경우 당신은 죄를 지었지만, 사랑에 대한 죄를 지었다. 따라서 부끄러울 수 있고 부끄러워해야 하지만, 정죄함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은 다시 자신을 '율법 아래'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다.“ 1절은 믿는 사람에게는 죄에 대한 정죄함이 없다는 로마서 1-7장의 중심 주제를 다시 생각나게 합니다. 2절은 우리가 더는 죄의 노예 상태가 아니라는 곧 하나님이 죄에 대해 거둔 승리의 두 번째 측면을 설명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 8장 2절에서 '법'은 힘이나 능력을 의미합니다. 성령은 죄의 노예 상태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우리 안으로 오셨습니다. 따라서 1절은 우리가 법적인 죄의 정죄함에서 놓여났다고 말하고, 2절은 우리가 실제적인 죄의 권세로부터 놓여났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기본적으로 말하는 바는 성령이 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는 정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2. 갈등 심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요?
3-4절은 더 이상 우리에게 정죄함이 없고, 우리가 노예상태도 아니라는 구원의 두 가지 요소를 하나님이 어떻게 충족시켰는지 보여 줍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인간의 모습으로 즉 3절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 보내셔서 속죄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죄 값이 치러져 법적으로 죄가 무효가 되었습니다. 둘째로, 우리의 실제 생활에서도 죄를 없애기 위해서 아들을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셨습니다. 4절“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해서 율법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존 스토트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구원의 방편으로써 율법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 곧 율법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근거로 우리를 구속하지는 않지만, 행위의 한 가지 기준으로서 여전히 구속력이 있기에, 성령을 따라 살 때 우리는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애쓴다.” 하나님은 왜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가 받을 정죄를 감당하게 하시고, 성령을 보내 우리를 노예 상태에서 해방하셨을까요? 4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모든 것, 곧 그분의 성육신 즉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심과 죽으심, 부활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목표는 우리를 거룩하게 해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사는 데 가장 큰 동기부여가 됩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을 때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와 죽으심. 그리고 사역의 목표와 목적을 헛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8장의 나머지 부분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의 두 번째 중요한 유익, 곧 우리 삶에서 죄를 극복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참된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역사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달리 말해 우리의 속사람이 어떻게 진정으로 5절”영 즉 성령을 따르는 " 삶을 원하게 할 수 있을까요? 그에 대한 대답은 "영의 일을 생각하는”사람만이 영을 따라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에 의하면 생각과 삶의 관계는 매우 밀접합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곧 당신의 생각이 당신의 성격과 삶의 방식을 만듭니다.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 혹은 무엇인가에 '생각을 집중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의도적으로 무엇인가에 집중하고 몰두하거나, 어떤 것에 완전히 사로잡혀 상상하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이든 당신의 생각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 당신의 인생을 만듭니다. 우리 삶에서 죄를 극복하는 것도 생각에서부터 시작되고, 죄에 대한 승리도 성령께 생각을 집중할 때만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하시는 일에 주목하십시오.” 따라서 죄에 대항하여 이기는 방법은 5절"영 즉 성령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일이란 무엇인가요? 8장에도 나오지만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14절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15-16절은 ”성령이 종의 영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확신을 준다고 말합니다. 26-27절은 성령이 우리에게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갈 확신을 준다고 말씀합니다. “.“ 이처럼 로마서 8장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양자로 받아들여졌는지에 대해 성령께 초점을 맞추며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졌음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어떤 신분의 변화가 있었는지에 대해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양자로 받아 주신 것을 우리는 반복해서 생각하고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3절“영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란 하나님의 자녀라는 우리의 특권을 결코 잊지 말고, 이것이 우리의 생각과 관점을 지배하게 하고, 더 나아가 말과 행위까지 지배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3. 전환: 영의 일을 잊어버리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항상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일에 생각을 집중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5절”육신의 일"에만 골몰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육신(sinful nature)"이라는 말을 NIV 성경은 이를 “육 (flash)"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감각을 지배하는 욕망으로, 그리스도 중심이 아닌, 자기중심적이며 거룩하기보다는 세속적인 세계관입니다. 죄악 된 인간의 본성이란 뜻입니다. 무엇이든 사람의 생각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므로, 육신의 생각은 죽음을 부르고 또 영의 생각은 6절에 ”생명과 평화“를 낳습니다 ““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9절에 성령이 내주 하지 않기 때문에 분명 마지막 심판의 날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죽음이라는 공의로운 정죄함에 직면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사람들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을 즐거워하고, 또한 하나님과 교제하며 번성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에 이끌리게 되면 원래 누려야 하는 것보다 훨씬 못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평화를 누리기는커녕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유와 생명을 누리기보다 노예 상태로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어떤 일로 극심하게 근심하고 가정해 봅시다. 하지만 당신이 근심하다가 쇠약해진다면, 그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또한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사랑을 베푸시기 위해 죽기까지 하셨다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인 가능성이 많습니다. 과도한 세상 근심은 바울은 고후 7:10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세상 근심은 영 즉 성령의 일 “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양자로 받아들여졌음을 기억한다면,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감정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생각을 죽이십시오. “.“ 7절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우리의 생각은 중립적일 수 없어서 하나를 거부하지 않고는 다른 하나에 집중할 수 없습니다" 육의 일에 사로잡힌 생각은 성령의 뜻을 거스르게 됩니다.. 하나님께 적대감을 품는 죄의 뿌리는 여전히 우리 생각 속에 깊이 박혀 있습니다. 이런 적대감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8절에”육신에 있는절에”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우리 자신에게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 수 있는 어떤 힘도 없습니다. 왜그런가요? 우리의 행위를 조종하는 생각이 하나님께 적대감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죄에 물든 육신 (flesh)의 지배를 받는 사람도 선한 생각과 올바른 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 즉 교만과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쁨이 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인 당신에게는 이렇게 살아가야 할 어떠한 필요나 의무도 없습니다. 9절에 성령이 그 속에 거하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게 되었을 때, 성령이 우리에게 들어와서 우리를 영적으로 살렸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은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싫어하고, 방해하는 죄 된 본성이 여전히 우리 속에 남아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6절"만약 당신 속에 남아 있는 죄 된 본성을 내버려 둬서 그것이 번성하게 된다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따라서 당신은 성령으로 그것을 공격해서 죽여야만 합니다. 당신이 죄로 물든 본성을 더 많이 없앨수록 성령이 주는 생명과 평화의 영적인 풍성함을 더 많이 누리게 될 것입니다 ““ 따라서 ”성령을 통해 몸의 행실을 근절하십시오. “.“ 12-13절은 어떻게 죄를 근절할 수 있다고 말합니까? 첫째, 죄의 근절은 죄 된 습관에 대해 인정사정없이 온 마음으로 저항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잘못된 태도와 행위를 무자비하게 섬멸하기 위해서 전쟁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단지 피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게 만드는 것과 심지어 그렇게 한다고 의심되는 것조차 멀리해야 합니다. 이것은 전쟁입니다! 둘째, 복음을 기억하고 삶에 적용함으로써 죄로 향했던 마음의 동기가 바뀌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12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그러므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 구속받았고 언젠가 육신이 부활해서 모든 악과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구원받을 것이라는 바울의 앞 주장을 가리킵니다. 그러고 나서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빚진"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 빚진 자들이므로,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과 앞으로 하실 일들을 생각한다면, 그분을 섬기며 사랑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에 끊임없이 맞닿아 있어야 우리의 죄를 근절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접촉을 통해 감사와 은혜를 더욱 깨닫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완전히 잠겨버린다면, 죄를 짓고 싶은 마음의 욕망이 줄어들고 약해져서 결국은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죄 자체를 미워하게 되면 죄 또한 우리를 미혹하는 힘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가 죄로 물든 습관으로부터 단호하게 돌아서서 성령의 일을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에 빚진 마음으로, 죄를 짓고자 하는 동기에서 돌아설 때, 그것이야말로 성령 안에서 죄를 죽이는 것입니다.
4. 대단원: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보라.
안타까운 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 위주의 설교로 자신을 통제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만약 저 일을 하면 하나님이 감동하실 거야. “.“ 그러나 이것으로는 죄를 죽일 수 없습니다. 대신 우리는 복음의 논리를 자신을 향해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것을 보라! 그런데 지금 나는 그분께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죄의 유혹을 받을 때 복음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발견해야 합니다.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성령을 우리 마음에 보내셔서, 죄의 역겨움을 알려 주시고, 또한 육신을 따라 살려는 욕망 대신, 구세주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신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청교도 존 오웬(John Owen) 목사는 자신의 마음을 향해 이렇게 설교했다고 합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주님의 사랑, 긍휼, 보혈과 은혜를 멸시하고 짓밟은 것인가?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통해 정결케 하신 내 마음을 다시 더럽힌 것인가? 귀하신 주 예수님께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그분과 교제하기를 그리도 하찮게 여긴 것인가? 주님이 얼마나 마음 아파하시겠는가?? 정녕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그 목적을 망치려고 계속 애쓸 것인가? “?“ 항상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고, 지금 사랑하시고 계시는지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을 넘치게 하십시오. 이것이 성령을 따라 죄를 이기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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