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시 130:1-8
2. 명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용서의 근거입니다. 선언적 명제
3. 제목: 용서의 원천
갈등: 용서는 신 구약 성경의 핵심 개념?
팀 겜벨 목사님의 ”용서를 배우다 “라는“ 글을 편집하여 올립니다. 용서하기가 쉬습니까? 아니면 어렵습니까? 사실 용서는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이며, 성경 전체에 배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버드대학의 성경학자 크리스터 '스텐달은 ”용서에 해당하는 가장 보편적인 헬라어 '아시스'와 '아피에미'가 바울 서신에 유난히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용서를 뜻하는 단어 중 하나가 본문에 없다고 해서 용서 개념이 부재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단어가 쓰인 횟수와 관계없이 용서라는 개념은 성경 신구약 전체의 의미와 그리스도인의 신앙에서 핵심에 해당합니다.
2. 갈등 심화: 구약 성경에 나타난 용서
구약 성경에 용서의 의미로 쓰인 히브리어 어근은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죄를 덮는다 “는“ 뜻으로, 다른 하나는 ”죄를 사면하거나 남 탓을 그만둔다 “는“ 뜻이며, 또 다른 어근은 ”죄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긴다 “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주의 깊게 읽으면 창세기의 거의 모든 주요 본문에서 용서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2장 17절에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즉 그날로 "반드시 죽으리라"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열매를 먹고도 계속 살아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창세기 2장 17절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선고하신 죽음이, 몸의 죽음인지 영적 죽음인지 둘째 사망인지 묻는다면 답은 전부입니다. 그가 생각하신 것은 영혼이 하나님을 잃는 첫째 사망만도 아니고, 다 끝난 뒤의 영원한 둘째 사망만도 아니라 전부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고 어거스틴이 말한 “영적“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소외되고 나무 사이에 숨어 서로에게서 소외되었습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가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죄를 짓던 날,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몸의 죽음"과 "영원한 사망의 벌“은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이 정하신 대로라면 아담과 하와는 마땅히 그 모든 벌까지도 당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입니다. 그분의 이 두 가지 속성은 모든 용서의 근간이 됩니다. 노아 홍수 이야기는 언뜻 보면 하나님이 죄를 심판하시는 기사로만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살펴보면 하나님이 홍수 이전에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참을 보시고 "마음 아파하셨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창 6:5-6절의 “마음 아파하셨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분노와 슬픔이 결합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성경의 서두에서부터 우리는 하나님이 죄를 어떻게 보시는지에 대해 놀라운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분노하시거나 슬퍼하시는 것 둘 중 하나만 하나님의 모습이 아닌 까닭은, 그분의 성품이 거룩하심이나 자비로우심 둘 중 하나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뒤틀어 변질시키는 죄 자체에는 분노하시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창조세계와 인류에게 미치는 죄의 악영향에는 애통해하십니다. 우리가 여기서 중요하게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죄는 특히 하나님을 마음 아프게 합니다. 데렉 키드너는 창세기 6장 6절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을 보며 "이미 하나님은 인간 때문에 고통당하신다"라고 아주 예리하게 짚어 냈습니다. 이 구절을 장차 그분이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자진해서 당하실 고난의 전조로 본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격노하시게 할 뿐 아니라, 마음 아프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양면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악과 불의를 벌하실 수밖에 없지만, 또한 자신의 사람들이 타락했음에도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 사이에는 분명 긴장이 있습니다. 그분은 죄를 벌하셔야 하지만, 죄인을 구원하기 원하십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용서의 특성과 하나님께 용서받는 방법이 가장 잘 표현되어 있는 곳은 시편일 것입니다. 시편 6. 32. 38, 51, 102, 130, 143편 같은 이른바 참회의 시에는 하나님께 용서받고자 할 때 회개하며 나아가는 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130 편을 보면,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자비를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들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 하시리로다.”.” 여기 “깊은 곳"이라는 은유는 사람이 바다나 웅덩이에 깊이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에서 착안한 것입니다. 이 깊은 곳은 어디일까요? 답은 3절에서 "자비를 부르짖는 소리"라는 시편 기자의 말에 이미 실마리가 들어 있습니다. 흔히 깊은 웅덩이에 빠진 사람이 부르짖는 것은 자비가 아니라 구조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깊은 곳은 죄책감과 수치심을 가리킵니다. 시편기자는 "사하심 즉 용서”를 구합니다. 이 기도 전체는 우리에게 용서를 보는 구약성경의 관점 몇 가지를 가르쳐 줍니다. 우선 이 기도는 용서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시편 기자는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신진대" 즉 우리의 죄와 악을 다 기억하실진대 "누가 서리이까"라고 반어적으로 여쭙습니다. 물론 답은 아무도 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서다'라는 표현의 영적인 의미는 하나님께 온전히 받아들여지거나 ’심판'을 견딘다는 뜻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에 설만큼 선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바울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을 롬 3:10절에서 가르칠 때 시편 14편 2-3절의 다윗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로마서 3장 10-18절에서 바울은 시편 130편을 인용해서 세상이 천국에 갈 만한 '선인과 그렇지 못한 '악인'으로 나뉘지 않음을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습니다. 심판 날의 시험에 통과할 만큼 기본적으로 선하고 단정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아무도 "서지“ 못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우리 죄가 하나님께도 기록을 남겨 우리가 심판 날에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때 우리는 모두 유죄로 판결 나 구원을 잃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는 하나님의 용서가 확실한 사실임을 가르쳐 줍니다. 시편 기자는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이라고 말합니다. "죄의 기록이 모든 사람을 정죄하겠으나 그래도 주께서 용서할 길을 내십니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시편 기자에게는 경이롭기만 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속량을 이루시는지가 시편 기자에게는 완전히 수수께끼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아는 우리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는 자신감과 겸손이라는 역설적 결과를 낳습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는 한편으로 한없이 높아지면서, 또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에 젖어 한없이 낮아집니다. 시편 130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의 최종 목표도 배울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여호와를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그가 결국 구하는 것은 단지 형벌의 유예나 면제가 아닙니다. 그의 목표는 오직 하나님 그분입니다. 그의 "영혼"은 다시 임하실 주님을 바라보며 교제와 소통을 열망합니다. 온전한 성경적 의미의 용서는 단지 사면이나 경감을 구하는 게 아니라 늘 관계의 회복을 추구합니다. 용서의 목표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며, 둘째는 그분과의 교제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의 "기다리나니"라는 말은 영혼이 하나님을 다시 볼 때까지 회개하며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3. 전환: 복음서에 나타난 용서
용서가 신약성경의 복음서에 이르면 용서가 한층 강조되면서 초점도 더 또렷해집니다. 거의 전적으로 하나님의 용서에 주목했던 구약 성경과 달리 복음서에는 인간의 용서, 그리고 인간의 용서가 어떻게 화해와 공동체의 치유를 이루어 낼 수 있는가에 대한 교훈도 나옵니다. 끝으로 상징적인 동물 제사를 넘어서는 용서의 근거에 대한 설명이 등장합니다. 그 근거를 알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얼마나 큰 희생이 따르는지를 무한히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신약성경에서 용서의 개념을 표현하는 데 쓰인 헬라어는 주로 두 가지입니다. ‘카리조마이'는 '카리스'"은혜라는 어근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을 마냥 계산적으로 대하지 않고 너그러이 베푼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란 자격이나 공로를 갖추어 얻어 내는 게 아닙니다. 다른 모든 선물처럼 용서 또한 은혜와 사랑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다만 베푸는 쪽의 희생이 따릅니다. 또 다른 단어 '아페시스는 '면제, 사면 즉 "사람을 법적인 의무나 부채에서 벗어나게 한다"라는 뜻입니다. 사면의 개념에 암시되어 있듯이 용서에는 늘 대가가 따릅니다. 빚을 탕감해 주는 채권자는 채무자 대신 자신이 빚을 갚거나 부담해야 합니다. 그래서 용서에는 가해자 몫의 형벌이나 부채를 피해자가 감당한다는 의미가 따릅니다. 복음서는 시작부터 메시지의 초점이 이미 용서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서 요셉에게 주어진 약속은 오실 메시아의 이름을 예수로 하라 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 예수님도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전파하고 가르치실 때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알 수 있고 그 결과로 우리 역시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다고 거듭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이 주기도문의 핵심입니다. 마 6:12절"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예수님은 마 6:14-15절“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라고 덧붙이셨습니다. 언뜻 보기와는 달리 이 말씀은 우리가 남을 용서해야 그 대가로 또는 그에 근거해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용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들에는 그런 의미가 없을뿐더러, 용서하지 않은 종의 비유에도 하나님께 받은 용서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근거, 동기, 그리고 원동력이라고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마 18:23-35 장에서 모든 기독교적 용서의 양대 차원 즉 ’’ 하나님의 용서'와 '인간의 용서‘를 이해할 수 있는 포괄적 틀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실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신성을 밝히셨을 뿐 아니라, 용서가 삶을 변화시킨다는 사실도 증언하셨습니다. 한 여자를 용서하실 때 예수 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눅 7:47절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여기서도 용서의 두 가지 차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증거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베풀고 용서하는 역량이 자란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용서받았다는 인식이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 은혜나 용서를 베풀 역량도 줄어들거나 아예 없어집니다. 용서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예수의 피입니다. 십자가에서 복음서는 죄 사함의 선포로 시작되고 끝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대적하는 이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눅 23:34절 “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눅 23:34 부활하신 후에는 제자들에게 죄를 용서받는 법을 세상에 나가 알리라고 명하셨습니다. 눅 24:47“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무엇보다 의미심장한 장면은 예수님이 죽음을 앞두고 교회에 성만찬이라는 성례를 제정해 주시는 모습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 잔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성경에서 제기된 모든 의문이 드디어 여기서 풀립니다. 그런 의문은 특히 출애굽기 34장 7절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때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라고 말씀하신 뒤로 늘 해결되지 않은 채였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어떻게 그분은 모든 죄를 벌하면서도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을까요? 죽으시기 전날 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수수께끼의 답을 주셨습니다. 용서의 객관적 근거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입니다. "흘리는 바 나의 피”로 상징되는 그분의 죽음 덕분에 우리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이를 누구보다도 명확히 말한 사람은 히브리서 기자일 것입니다. 히 10:11-12"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 된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요컨대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가장 지혜롭고 경이롭고 영화로운 방식으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둘 다 충족시키셨습니다.
4. 대단원: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C. S. 루이스의 짤막한 글 "용서에 관하여"를 보면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깨달은 내용이 나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때 사실은 변명을 받아 주시기를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용서와 변명은 천지 차이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맞다, 당신 잘못이다. 그렇지만 내가 당신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다시는 이 일을 문제 삼지 않겠다. 우리 둘 사이는 모든 것이 이전과 똑같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변명을 받아 준다는 것은 "당신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거나, 고의가 아니었다. 정말 당신 잘못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우리 대다수가 교회에서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사옵니다"라고 사도신경을 외우지만, 사실은 그렇게 믿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대신 우리는 자신의 죄가 무난한 수준임을 입증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를 다시 받아 주시지 않을 그거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진정한 용서란 변명의 여지없이 죄를 그 속의 모든 섬뜩함과 더러움과 비열함과 악의까지 똑바로 응시하되, 그런데도 가해자와 온전히 화해한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인간이 외부의 도움 없이 그렇게 하기는 너무나 어렵고, 어쩌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 안에서 초자연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루이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줄기차게 가해 오는 도발을 매번 용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의 처지를 기억해야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변명의 여지없는 죄를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님도 변명의 여지 없는 당신의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깨닫고, 믿어 그 사랑으로 용서받은 사람이기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사랑에 감동이 되어 용서할 힘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당신의 죄를 용서합니다. 그리고 당신과 화해하기를 원한다고 선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용서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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