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 3:16-18
명제: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자비로운 하나님이시다. 선언적 명제
3. 제목: 사랑과 진노의 하나님
갈등: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중 어떤 분이신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용서의 근거인 이유는, 십자가 덕분에 하나님이 그분의 공의를 타협하지 않고도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이 십자가가 가해자를 용서할 동기와 모델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난 피해자인 우리가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는지를 깨달으려면, 최고의 피해자이신 하나님이 어떻게 용서하셨는지를 봐야 합니다. 그분이 용서하시는 방식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용서를 구하는 수많은 기도는 풀리지 않는 큰 의문을 남겨 놓았습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은 거룩하고 공의 즉 정의로우신 분인데, 도대체 어떻게 용서가 가능하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죄를 벌하시는 것은 그분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늘 정의로우시므로 불의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를 반드시 징벌하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를 행하시며 어떤 죄나 악도 대충 넘어가거나 묵과하거나 무시하실 수없습니다. 헤르만 바빙크는 "용서가 하나님께 당연한 것이라는 얄팍한 사상"을 반박했습니다. 구약성경에 주께서 죄를 사하지 않으신다는 본문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분명 의로우시고 그 의를 양보하지 않으심에도 불구하고, 구약성경에는 그분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주장과 약속도 가득합니다. 사 6:7절 “이사야가 높이 들리신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고 고뇌 속에서 자신의 철저한 죄성을 자백했을 때 하나님은 즉시 그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이렇듯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분이시며, 그 용서가 신기하고 이해할 수 없는 선물이라고 가르칩니다. 구약성경의 계시의 핵심에 놓여 있는 이 가르침의 역설은 출애굽기 34:6-7절“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구약 성경는 하나님이 죄인을 마치 무죄인양 취급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긴장이 팽팽합니다. 어느 쪽입니까? 그분은 죄인을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인가, 아니면 죄인을 벌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인가요? 양쪽다 그분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진노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양면이 모순되지 않고 서로 협력해 세상을 구원하는지를 우리는 십자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요 3:16절은 틀림없이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입니다. '기분 좋은' 구절이지만, 문맥에서 떼어 낼 때만 그렇습니다. 바로 다음 18절에는 심판 정죄가 언급되고, 좀 더 뒤로 가면 요 3:36절에 그 단어가 이렇게 매섭게 정의되어 있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현대인은 정죄하시는 진노의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어려워하지만, 성경에는 이렇게 정죄에 대한 구절과 사랑에 대한 가장 유명한 구절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과 분노를 결코 대립 개념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분의 진노와 사랑이 서로 조화되는 이유는 우리와 달리 그분의 진노와 사랑은 둘 다 완전히 거룩하고 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노하는 이유는 대게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들이 위협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궁극적 사랑의 대상에는 우리의 대외 이미지나, 자존심, 삶에 만족을 가져다줄 것 같은 소중한 계획, 등이 포함될 때가 많습니다. 바로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것들이 위협받으면 분노해서 종종 사람을 해치고 일을 망칩니다. 성경에 언급된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보면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분의 분노도 우리와 같을 거라 생각하고 몸을 사립니다. 그러나 우리와 달리 하나님의 분노는 상처 입은 자존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시는 것들 즉 그분의 영광과 우리의 행복을 위해 지으신 창조세계와 인류를 해치는 안에만 노하십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며, 진노의 하나님만도 아닙니다. 둘 다이십니다. 당신의 하나님관에 양쪽의 개념이 모두 포함돼 있지 않다면, 현실에 대한 당신의 전반적인 인식, 특히 용서를 보는 관점이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것도 거부하지 않으시는 사랑의 하나님만 보거나,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으시는 분노의 하나님만 본다면 우리 삶이 비뚤어집니다. 그것은 삶 전반을 보는 관점과 살아가는 방식에 영향을 미칩니다. 어떻게 결정하고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주변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을지가, 다 거기에 영향을 받습니다. 사랑의 하나님만 믿는 사람은 응석받이처럼 살아가고, 진노의 하나님만 믿는 사람은 학대당한 아이처럼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격노를 함께 보여 주는 자리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한 것이 없습니다. 십자가에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진노가 둘 다 충족되고, 둘이 만나 조화를 이룹니다. 응석받이나 학대당한 아이처럼 살아가지 않으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깨닫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2. 갈등 심화: 하나님의 진노는 사랑의 표현이다
절대적인 도덕 기준이 있으며 그 기준을 어기는 이들을 하나님이 벌하신다는 개념은 현대 지식층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런 개념에 반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예수님이 요약하신 하나님의 율법은 완전한 균형을 이루어 마 22:36-40절에서 “첫째는 하나님 사랑 둘째는 이웃 사랑 즉 온전히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온전히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창조세계와 다른 사람들, 즉 하나님이 지으셨고 사랑하시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C .S. 루이스의 유명한 글에도 있듯이, 진노의 신이 없다면 사랑의 윤리도 심어 줄 수 없습니다. 그분은 사랑의 본을 보이실 뿐 아니라 사랑 없는 행동을 벌하십니다. 도덕적 상대주의를 배워 온 학생들에게 인성을 길러 주려는 현대 도덕 교육의 헛수고를 루이스는 이렇게 기술했습니다. "사람들을 냉혈 인간으로 만들어 놓고는 그들에게 덕과 바른 정신을 기대한다. 신의를 비웃어 놓고는 혹시라도 배반자가 나오면 경악한다. 거세해 놓고는 그 거세당한 동물에게 새끼를 낳으라 한다" 모든 도덕적 가치가 상대적이고 사회적 구성 요소일 뿐이라면, 누구나 타인을 착취하지 말고 사랑으로 대해야만 한다는 주장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우주의 배후에 사랑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해 놓고 어떻게 사람들로부터 정의 실현에 필요한 희생을 끌어낼 수 있겠습니까? 도덕적 주장을 정당화할 길이 그것밖에 없다면, 누구든 이기적인 선택으로 실리를 취하지 못할 까닭이 무엇입니까? 절대자가 사랑의 인격신이라는 개념은 기독교 고유의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성경에서 시작됐고, 대단히 희한하고 이상하게 여겨졌습니다. 인간 사회는 복종을 요구하거나 서슴없이 사랑을 말해 버리는 진보 위주의 신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우리 모두를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시는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만은 정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인간 사회는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뺨도 돌려 대고, 모든 사람을 심지어 가장 약한 자들까지도 무한히 귀한 존재로 대하라는, 사랑의 윤리를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고대 이교도들은 기독교적 관점의 자비와 용서를 처음 들었을 때 불쾌해하면서 그것을 위험하고 쓸데없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많은 지역에서 기독교적 관점이 우세해지면서 세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역사가들은. "모든 사회는 하나같이 우리가 약자를 공격해 노예로 삼을 권리가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 누구나 늘 그렇게 해 왔다. 그래서 역사적 관점의 진짜 의문은 이것이다. 왜 누군가에게 그게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는가? 그생각을 처음 한 사람이 누구인가?" 역사가들은 4, 17, 18, 19세기에 각각 노예제도 철패를 제일 먼저 부르짖은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정의를 부르짖은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하나님이 계셔서 우리에게 이웃 모두를 우리 자신같이 사랑하라고 명하셨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궁극적으로 사랑 때문이며, 그래서 그분의 사랑은 종종 진노로 표현됩니다. 레베카 피펏는 이렇게 묻습니다. “참사랑은 우리를 파멸로 몰아가는 기만과 거짓과 죄에 대항한다. 인간이 경험하는 분노와 사랑은 떼어 낼 수 없는 관계로 묶여 있다. 자아에 도취된 흠 많은 죄인인 나도 다른 사람의 상태 때문에 이렇게 고통과 분노가 깊을 수 있다면, 그들을 지으셨고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분노는 사랑의 반대가 아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며, 미움의 극한은 무관심이다." 흠 많은 인간인 우리 안에서도 이처럼 사랑과 분노는 대립 개념이 아니며, 오히려 상호 의존적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성경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확인되어 있듯이 하나님은 당연히 죄와 악을 대적하십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그런 주님이 죄 때문에 눈물 흘리십니다. 죄 때문에 그분은 창 6:6절"마음에 고통이 가득하다." 호 11:8절 ”하나님은 그분의 긍휼을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눈물을 흘리신다. “ 눅 19:41-44절” 예수님도 악한 예루살렘 때문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 하나님은 냉혹한 신이 아니시지만, 그렇다고 죄와 타협하지도 않으십니다. 성경에 계시된 그분은 진노의 하나님만도 아니고 사랑의 하나님만도 아니십니다. 사랑과 진노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사랑도 거룩하고, 그분의 진노도 거룩합니다. 이는 악을 대적하신다는 그분의 철칙이 내 삶에도 작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거스르면 곧 나 자신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주의 이치를 그렇게 정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도 빠져나갈 수는 있겠지만, 그 죄의 결과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이 또한 그분의 사랑에서 비롯된 조치입니다.
3. 전환: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
우리는 '보수' 신앙과 '진보' 신앙 중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보수 신앙의 뿌리가 엄하신 하나님께 있고, 진보 신앙은 상대주의적이며 하나님을 무엇이나 다 받아 주시는 분으로 인식합니다. 어떻게 하면 양쪽 왜곡을 모두 피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참으로 사랑과 진노의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실체가 극대치로 드러난 곳은 십자가입니다. 우리의 인식을 바로잡고 둘로 나뉘지 않은 마음을 받으려면 바로 십자가로 가야 합니다. 존 스토트는 ”그러므로 대신한다는 개념이 죄와 구원, 둘 다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죄의 본질은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한 것이고, 구원의 본질은 하나님이 인간을 대신하신 것이다. 인간은 감히 하나님께 맞서 그분께만 합당한자리로 올라섰고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희생해서 우리에게만 합당한자리로 내려오셨다. 인간은 하나님의 특권을 찬탈했고, 하나님은 인간의 형벌을 받으셨다. “.“ 바울도 롬 3:25-26절"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의로우신 그분이 또한 용서하십니다. 사랑과 율법은 둘 다 승리했습니다. 하나가 다른 하나에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각자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고, 오히려 각자 명예롭고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타협은 없었습니다. 율법과 사랑은 둘 다 본분에 충실했고, 일점일도 꺾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는 극도로 엄격했고, 다른 하나는 극도로 자애로웠습니다. 둘이 하나로 합쳐진 이때보다 더 사랑이 사랑다운 적도 없었고 율법이 율법다운 적도 없었습니다. 바울은 롬 11:33-36절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예수님이 우리 대신 율법을 완전히 충족시키셨으므로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정죄하신다면 불의한 처사가 됩니다! 어떤 죄로든 우리를 벌하신다면 하나님은 예수님이 이미 지불하신 동일한 빛을 두 번 받아 내시는 셈입니다. 그분의 율법과 사랑이 둘 다 우리 편입니다. 우리는 이보다 더 안전할 수 없습니다. 요한은 요일 1:9절“ "만일 우리가 자백하시면 그는 미쁘시고 우리 죄를 사하시며"라고 썼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내 죄값을 전액 다 받으셨기 때문에 이중 상환을 요구하시는 것은 불의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진노는 예수 안에 있는 당신을 대적하지 않고 그분의 사랑과 함께 십자가에서 당신을 위해 불타오릅니다. 양쪽이 서로 어우려저 똑같이 당신을 위해 빛을 발합니다. 당신을 위해 당신 대신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신학적 실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영적으로 당신은 응석받이나 학대받아 방치된 아이처럼 됩니다. 이 진리를 깨닫고 내 것으로 삼았는지 알아볼 수 있는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어떤 사건을 계기로 당신의 죄가 아주 명백하게 드러날 경우 당신은 하나님과 멀어지는가, 아니면 그분께 더 다가가는가? 하나님과 기도와 교회를 계속 피하고 싶다면, 이는 예수님이 당신에게 해 주신 일을 당신이 모른다는 증거다. 그것을 안다면 당신과 하나님의 내적 대화는 아마 이렇게 될 것입니다. 주님. 주님이 저를 위해 죽으셨고 저를 받아주신다는 것을 전에도 알았지만 제가 이 정도로 미련하고 악한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래서 이제 주님의 사랑이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한량없고 과분합니다!" 십자가를 깨달으면 자신의 삶에서 새로운 깊이의 약점과 허물과 악이 발견될수록 주님과 더 떨어지는게 아니라 오히려 더 가까워집니다. 절망감과 수치심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내면의 음성은 늘 바보나 멍청이나 패배자라 힐난하는 것 같습니다. 그 소리는 길을 가는 중에도 들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사랑받기를 바란다고 이러고도 네가 그리스도인이야? 네가 한 짓을 봐." 이럴 때 당신은 어떻게 대처합니까? 학대 받아 방치된 아이는 변명하려 합니다. 그 음성을 당신은 혹시 이렇게 반박하지는 않습니까? "일진이 나빠서 그린 거야. 물론 잘한건 아니지만 엄마 때문에 "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신에게 해 주신 일을 참으로 깨닫고 즐거워하면, 당신은 그 소리에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지금 죄책감이 드는 이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원래 나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인간이다. 내힘으로는 안 된다. 누구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실 수 있다. 예수님은 실제로 친히 무한한 대가를 치르시고 다 이루어 주셨다. 이제 나는 그분 안에 있으니 바로 예수님이 내 지혜와 의와 성화와 구원이시다." 아멘!
4. 대단원: 사랑만이 더 많은 사랑을 낳고 키울 수 있습니다.
진노의 하나님 밖에 모르고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일을 잘 모른다면 당신은 늘 쫓기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착하고 반듯해지려고 열심히 노력하겠지만, 아무리 애써도 늘 자격 미달로 느껴질 것입니다. 사랑의 사람으로 성장하기도 어렵습니다. 두려움은 사랑을 낳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더 많은 사랑을 낳고 키울 수 있습니다. 양심의 소리 또는 사탄의 소리가 다가와 ”너처럼 형편없는 인간은 꺼져 버려야 해! 부끄러운 줄 알고 물러나야지”라고 말할 때, 당신은 십자가를 기억하며 예수님의 이런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내 사랑아, 이리 오렴, 비난이라면 내가 이미 다 너를 위해 당했단다” 신학자 카우퍼는 이를 "주가 율법을 이루시니 노예가 자녀로 변하고 무거운 의무도 가볍고 즐거워지네"라고 노랬습니다. 이것이 공의와 사랑의 주님이 주신 은혜의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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