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에 대한 이론/그리스도 중심적인 네러티브 설교

중생

wordlove 2024. 3. 10. 14:40

1. 본문: 딛 3:1-8

2. 명제: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선행도 아니며 성례도 아니며, 하나님의 자비이시다. 선언적 명제

3. 제목: 씻음과 새롭게 하심으로 거듭난다./ 중생/ 거듭남

 

갈등: 거듭남이란 무엇인가?

성경에서 중생이라는 단어는 딛 3:5"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되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에 나옵니다. 중생이란 말은 예수님이 요 3:5절에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여기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거듭난다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 19: 28절에서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여기 새롭게 되어’라는’ 말은 피조물의 거듭남을 말합니다. 이것은 이사야 6517절과 6622절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거듭남을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일어나는 일로 생각하십니다. 인간만이 타락하고 부패하고 무질서한 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다 그렇습니다. 왜 그런가요? 인간이 태초에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이 죄의 무서움을 가시적으로 드러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질병, 퇴화, 자연재해 등은 죄가 세상에 들어와 널리 퍼트린 결과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종합하면, 하나님의 목적은 모든 피조물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온 우주가 자신의 무익함과 부패와 질병과 퇴화와 재난을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완전한 새로운 질서로 대신하게 됩니다. 이것은 크고 우주적인 중생, 크고 우주적인 거듭남입니다. 바울은 딛35절에서 이 단어 중생을 사용하면서 우리의 거듭남이 우주의 거듭남의 한 부분임을 우리가 알길 원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8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그러므로 자신의 거듭남을 장차 이루어질 우주적 거듭남의 서막으로 생각하십시오. 당신의 몸과 온 세상이 어느 날 이러한 중생에 참여합니다. 하나님의 최종 목적은 영적으로 새로워진 영혼이 질병과 재난에 찌든 노쇠한 몸에 거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의 새로워진 영혼이 새로워진 몸에 거하는 새로워진 세상입니다. 이것이 딛 35절의 중생이라는 단어가 가진 큰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 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바울은 7절에서 거듭남의 목적을 말합니다.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상속자란 이러한 영생에 포함된 모든 것 즉 새 하늘, 새 땅, 새몸, 새롭고 완벽한 관계, 선하며 영광스러운 만물의 새롭고 죄 없는 모습, 하나님을 기뻐하는 새로운 능력, 곧 우리의 모든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을 받는 상속자를 의미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2. 갈등 심화: 왜 거듭남이 필요한가?

그 답이 바로 디도33절에 나옵니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이것은 물질적 피조물에 관한 묘사가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에 대한 묘사입니다. 이것들은 물질적인 악이 아니라 도덕적인 악입니다. 어리석은자, 순종하지 아니한 자,, 속은 자,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 악독과 투기를 일삼는 자, 가증스러운 자, 피차 미워한 자 우리 모두 이 가운데 어딘가에 속합니다. 우리가 거듭나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런 삶을 습관적이요 일상적인 삶을 사는 자들을 자신의 새로운 세상에 들이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합니다. 우리 모두 거듭나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다음에 매우 귀한 성경구절 가운데 하나가 나옵니다. 4절에서 그러나 하나님"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없으며, 3절에서, 우리는 어리석었으며, 순종하지 않았으며, 속았으며, 정욕과 행락의 종이었으며, 악독과 투기를 일삼았으며, 가증스러운 자였으며, 서로 미워했습니다. 4-5절에 그러나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되" 이것은 매우 놀라운 결과로, 에베소서 23-5 절이 말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우리는 죽었으나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의미입니다. 죽은 자기 자신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딛 33-5 질이 말하는 핵심입니다. 우리는 아주 강한 정욕과 행락의 종이었기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지도 못하고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며 사랑하는 능력에 관한 한 죽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 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왜 우리가 거듭나야 합니까? 우리는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3. 전환 :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거듭남을 일으키시는가?

요한복음 3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에서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딛 35절 끝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구원하셨다고 말합니다. 중생은 일종의 씻음입니다. 중생은 일종의 새롭게 하심입니다. 예수님이 요 35절에서 하신 말씀을 상기해 보십시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이 말씀과 딛 3장 55절은 유사합니다. 너희는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구원받았습니다. 3장과 관련해 물과 성령이라는 용어는 에스겔 3625-27 절에서 왔습니다. 에스겔서 3625-27 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약속하십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말하자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새 언약의 약속한 때가 이르렀도다. 에스겔의 약속이 성령을 통해 이제 내게서 이루어지리라. 6:63에서 성령은 생명을 주시느니라, 14: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성령께서 믿음을 통해 너희를 나와 연결하실 때,, 너희가 거듭나리라." 거듭남은 과거의 모든 것으로부터의 씻음과 미래의 모든 것을 위한 새롭게 하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딛 35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되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 언약의 약속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제 시작되었고 우주의 최종적 '중생'도 시작되었습니다. 너희의 거듭남은 너희가 범한 모든 죄로부터 씻음을 받는 것이며, 성령께서 새 본성을 창조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거듭난 후에도 여전히 너희다. 그러나 두 가지가 변했습니다. 너희는 깨끗하며 새롭다. 이것이 거듭남과 중생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까? 바울은 우리의 거듭남이 우리가 무엇을 했느냐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때문이라는 점을 강조하려 합니다. 4-5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거듭나게 하시는지에 관해 세 가지를 말합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 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5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중생입니다. 바울은 구원과 중생의 근원을 찾아 하나님의 '자비'(goodness. 선하심)'사랑하심'과 '긍휼하심''긍휼 하심'에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죄인들을 어떻게 거듭나게 하시는가에 대한 바울의 답변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십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당신이 거듭났다면, 다시 말해, 영적 죽음에서 깨어나고,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되살아나며, 예수님을 궁극적 만족을 주시는 분으로 깨닫는 영적 감각이 되살아나고, 그분을 신뢰하는 믿음이 되살아났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 때문입니다. 바울은 엡 27절에서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신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길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자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별들이 제자리를 지키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주관하시며, 참새 한 마리의 추락까지 주관하시며 당신의 머리털까지 세십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강하고 지혜롭고 거룩하고 공의롭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하나님은 자비롭습니다. 3:4"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우리가 거듭난 것은 하나님의 자비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바울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본성 둘째는 '사랑하심'으로 번역됩니다. '사랑하심'으로 번역한 헬라어 단어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사용하는 일반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사실, 신약에서 이 단어는 두 번만 사용됩니다. 뜻은 인류애, 친절의 의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마음이 인간에게 선을 행하려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가장 높은 의미의 박애주의자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거듭났다면 인간에게 복을 주려는 하나님의 마음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4절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자비와 인간에게 복을 주려는 그분의 마음이 ‘나타났다'‘나타났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단지 하나님의 존재 속에 머물 뿐 우리 가운데 내려와 인간의 형상을 취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구원하지 못하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이 질문의 대답은 4절에서 하나님이 우리 구주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6절에서는 예수님이 "우리 구주 하나님라 불리십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 다시 말해, "우리 구주하나님이 우리 구주 그리스도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현현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거듭남이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역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거듭남은 역사와 무관하고 모호한 영적 변화가 아닙니다. 거듭남은 우리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듭남은 그분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되도록 성령께서 믿음을 통해 우리를 역사 속에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하시는 객관적이며 역사적인 행위입니다. 거듭남이 일어나는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함으로써 세상에 오셔서 우리 죄 때문에 죽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입니까?

 

4. 대단원: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우리의 거듭남을 설명하는 하나님의 본성의 마지막 부분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긍휼을 말하면서 거듭남의 근간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우리의 행위를 대비시켜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5절을 보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 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당신이 거듭났다면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긍휼히 풍성하십니다. 우리는 거듭날 자격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돌처럼 굳었고, 거역했으며,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거들떠보지 않으셨더라도 그분은 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2:4-5"그러나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 우리의 새 생명, 우리의 거듭남은 하나님의 긍휼 덕분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롭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긍휼히 풍성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듭났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무엇인가를 부정해야 할 책임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성품을 잘 아십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면 자신이 좋은 일을 했기 때문에 그런 게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우리의 본성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 부분에 대해 경고합니다. 거듭남을 통한 구원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말라. 바울은 '이 구원은 율법의 행위 때문이 아니었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 거듭남은 ’우리의 의로운 행위 때문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당신의 최악의 행위와 동기뿐 아니라 최선의 행위와 동기까지도 배제됩니다. 당신의 최선의 행위와 동기가 거듭남의 원인이 아닙니다. 이것들이 당신을 거듭난 상태로 지켜 주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거꾸로입니다. 거듭남이 최선의 동기와 행위의 원인입니다. 이것이 5절에 나오는 '중생의 씻음'이 세례를 말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가지 이유입니다. 옛 언약의 할례든 새 언약의 세례든,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선행도 아니며 성례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값없는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이것들이 우리의 거듭남을 설명합니다. 할례가 아닙니다. 세례가 아닙니다. 우리의 의로운 행위가 아닙니다. 거듭남이 먼저 오며, 의로운 행위를 수반합니다. 의로운 행위가 먼저 오고 거듭남을 수반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이 거듭난 것은 당신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라는 진리만큼 당신을 겸손하고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 진리를 보는 눈을 주시길 바랍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 앞에 엎드리며 기뻐하십시오. 주님의 자비, 사랑, 긍휼로 나는 거듭남 즉 중생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은혜를 알고 깨닫고 은혜가 나를 다스릴 때에 나는 거룩하신 주님을 닮아갑니다. 나의 본성은 할 수 없지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도 예수님처럼 자비로우며, 사랑스러우며, 긍휼의 사람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거듭남이 우리의 모든 선한 행실의 원인이요. 동기이며. 근원입니다. 여러분은 거듭났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