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롬 6:13, 고전 6:9-10
2. 명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신자는 마땅히 선행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선언적 명제
3. 제목: 선행의 근거
여러분, 1563년에 작성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독일에서 만들어진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인데요, 총 129개의 문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책을 보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 부분에서는 우리 인간이 얼마나 죄 가운데 빠져 있는지, 두 번째 부분에서는 그 죄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부분에서는 구원받은 우리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룹니다. 특히 1부와 2부에서는 우리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가능하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을 알려줍니다. 선행은 결코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행위는 무가치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여기서 사람들이 꼭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그렇다면 그냥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거 아닙니까?" "아무렇게나 살다가 죽기 전에 예수님 믿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여러분, 이런 질문 들어본 적 있으시죠? 오늘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왜 '굳이' 선행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1. 왜 우리가 선행을 해야 할까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86문은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의 공로가 하나도 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가 선행을 해야 합니까?" 그리고 그 답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의 보혈로 구속하셨을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새롭게 하셔서 그분의 형상을 닮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선행을 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또 우리의 믿음을 확신하고 다른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기 위해서 우리는 선행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극단적인 잘못을 피해야 합니다. 선행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 즉,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리새인들이나, 초대교회 때의 펠라기우스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원죄를 인정하지 않고, 자유의지로 선을 행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또 다른 극단은 선행을 너무 무시하는 것입니다. 즉, "어차피 구원은 믿음으로 받았으니까, 선행은 필요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율법을 강조하는 걸 '율법주의'라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자는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 두 극단을 모두 경계합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구원받았기 때문에 선행을 해야 합니다.
2.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우리는 선행을 할 수 있을까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8문에서는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부패해서, 선을 조금도 행할 수 없고, 오직 악한 일만 행하는 존재입니까?" 답은? "그렇습니다!" 제8문의 질문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같이 부패하고 무능한 상태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 답변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는 거듭날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 인간은 아담의 타락 이후 완전히 부패한 존재이며, 스스로 선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거듭날 수 있으며,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86문은 차근차근 설명합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보혈로 우리를 구속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성령으로 새롭게 하시고 자신의 형상을 닮게 하십니다. 이 두 가지는 항상 함께 갑니다. [신자의 구속]과 [구속의 적용]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속하신 뒤 멋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하셨다면 우리는 다시 옛사람으로 순식간에 돌아가 버렸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분의 보혈은 헛된 희생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선행을 할 수 있는 이유, 바로 여기에 선행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인간은 죄를 지어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그 때문에 짐승과 같은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비참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고, [성령을 보내셔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선행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성령으로 새롭게 하신 덕분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역사로 우리는 거듭날 수 있고, 거듭난 자만이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은 자기 힘으로 선을 행할 수 없지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선을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선행할 능력이 주어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몸을 "의의 무기"로" 드려야 합니다. 롬 6:13절? "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았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선행이 주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그렇다면, 선행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줄까요? 먼저, 우리 자신에게 유익을 줍니다. 선행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지는 않지만,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때,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직접 선한 행위를 실천하는 것도 우리의 믿음을 굳건하게 합니다. 둘째는 우리 이웃에게 유익을 줍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유익을 주지만, 믿음 자체가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선행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불신자들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을 보고 믿음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행을 실천할 때, 그것이 복음의 증거가 됩니다. 가까운 가족과 이웃에게 어떻게 전도할 수 있을까요? 예수 믿고 변화된 선행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4. 그러나 선행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87문은 경고합니다. "감사치도 않고 회개하지 않는 삶을 계속 살면서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는 사람들도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답은 단호합니다.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6:9-10에서 사도 바울은 선언합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 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 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여기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은 영원한 심판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뜻합니다. 즉, 이러한 죄를 지속적으로 행하며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구원의 확증이 없는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구절에 대한 신학자들의 해석은 이러합니다. 칼빈은 이 구절을 단순한 죄의 목록이 아니라,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특징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특히 "미혹을 받지 말라"는 표현을 강조하며, 이러한 죄를 지속적으로 행하면서도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거짓된 확신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칼빈은 완전한 무죄 상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대항하여 싸우며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로이드 존스는 이 구절을 구원받은 성도의 변화된 삶과 연결하여 해석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단순한 미래의 개념이 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언급이라고 강조합니다. 즉,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은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자들로 하나님 나라에 속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WBC 주석는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미래에 실제로 발생할 결과를 뜻한다고 해석합니다. 즉, 이러한 죄를 지속적으로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결코 소유하지 못할 것임을 의미합니다. "미혹받지 말라"는 명령법으로 이는 계속적인 경고를 의미하며, "계속해서 속지 말라"는 강한 명령형입니다. 즉, 사람들이 스스로 속거나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속지 않도록 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칼빈, 로이드 존스, 모두는 성도의 삶에서 나타나는 성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구원은 회심과 변화된 삶의 증거가 반드시 따라야 함을 가르칩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삶에서 어떠한 선행도 하지 않는, 즉 감사와 회개의 삶을 전혀 살지 않는 자를 가리켜하는 말입니다. 이들은 결코 구원을 받지 못하는데, 그에게 믿음 자체가 아예 처음부터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행위를 통해 악함을 드러내고 결국 멸망의 길로 걸어갑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경고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확실한 심판 선언입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삶에서 아무런 선행도 하지 않고, 감사와 회개의 삶을 전혀 살지 않는 자들은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 삶이 죄악 가운데 있다면, 그는 처음부터 진정한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구원파와 같은 이단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선행이 없어도 구원에 문제가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를 강력하게 부정합니다. 선행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며, 죽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21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삶에서 선행이 없다면,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여전히 죄악을 즐기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 성령의 역사가 없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령으로 새롭게 하셨다면, 우리는 반드시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닮아야 합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셨고, 죄인을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본받아야 합니다. 코리 텐 붐 여사의 이야기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들을 숨겨주다 나치에게 체포되었고, 강제 수용소에서 고난을 겪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자신을 학대했던 나치 간수가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자 그녀는 처음에는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용서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은혜로 나도 용서합니다"라고 선언하자, 기쁨이 넘쳤다고 간증했습니다. 이 일화는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코리 텐 붐은 용서와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아름다운 선행을 통해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고, 복음을 전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선행을 행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무겁게 받아들이십시오. 구원받은 자는 반드시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의 삶에 여전히 죄가 지배하고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가볍게 여기지 맙시다. 오늘도 선행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주님을 닮아, 그분의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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