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롬 3:20-31
2. 명제: 율법 외에 하나님께로부터 온 의가 나타났다. 선언적 명제
3. 제목: 그러나 이제는
바울은 롬 1장 18절로부터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저 엄청난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이어, 사도는 1장의 나머지 부분과 2장 그리고 3장의 첫 부분을 계속하여 써 내려가면서 이방인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똑같이 해당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3장 20절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음을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바울은 전에 있던 어떤 사람도 또는 앞으로 있을 어떤 사람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의를 제시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소망이 전혀 없다는 말인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21절에서 ’그러나 이제는' 우리 성경에는 그러나 라는 말이 나오지 않지만, 헬라어 원어나 영어 성경에는, ‘그러나’ 라는 말이 분명하게 나옵니다, (But now)이란 두 마디 말보다 성경 전체에 나타난 말 중에서 더 놀라운 말은 없습니다. 그는 처음엔 어둡고 절망적인 그림을 그립니다. 그리고 나서 “그러나 이제는" 이란 말을 꺼내는 것입니다. 청교도들과 그 많은 후계자들은 복음을 소개하기에 앞서 율법의 작용이 우선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가장 위대한 복음 전도자 가운데서 몇몇 사람의 생애를 읽어 보십시오.. 죠지 화잇필드, 요한 웨슬리, 요나단 에드와드, 로버트 머리 맥케인 등 다른 19세기의 인물들의 경우에서도 이들은 언제나 복음에 앞서 율법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여러분은 자신이 정말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확실하게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저는 “그러나 이제는"이라는 말이 가장 훌륭한 시금석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체험 가운데에 "그러나 이제는”이라는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까? 당신에게 마귀가 와서 대들면서 '네 마음속‘에‘ 아직도 존재하는 죄악 된 생각이나, 아직 변화되지 못한 죄악된 습관, 전에 행한 짓들을 보니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비난하며, 당신을 저주할 그 때에 당신은 마귀에게 무어라고 대꾸합니까? 마귀의 말이 옳다고 머리를 끄덕입니까? 아니면 '네 말이 옳다. 그러나 이제((But now)......'이라 말합니까? 당신은 마귀에 대항하여 이 말들로 대적합니까?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하는 입장의 진수입니다. 마틴 루터가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진리를 깨달은 바로 그 순간부터, 계속 그치지 않고 ’그러나 이제는“ 라는 말을 선포했습니다. 그 점은 참으로 루터의 위대한 설교와 가르침의 중심을 이루었습니다. 그것은 정확히 말해서 믿음이 행한 것이었습니다.. 믿음은 일종의 저항이요, 우리를 대적하는 세상과 지옥에서 나오는 모든 말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굳건히 서게 하는 반석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나의 새로운 신분으로 말미암아, 영원토록 아무도 나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제는 더 이상 저주 아래 있지 않다. 전에는 내가 거기 있었으나, 이제는 더 이상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다”라고” 여러분도 이렇게 외칩니까? 여러분은 믿음으로 서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우리 모두는 저주 아래 있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과 시험하심 앞에 가지고 나갈 수 있는 의를 행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한 가닥의 소망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이란 말을 기뻐할 준비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나 이제는 “라는“ 이 말이 의미하는 취지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그러나 이제는'이란 말은 시간적인 요소를 나타내 주기도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참된 의미는 이러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하나님의 의는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연관된 모든 사건들, 즉 그의 강림, 생애와 죽음, 부활, 승천 등 모든 사건들이 일어난 후의 비교적 얼마 되지 않은 때에, 이 말씀을 하고 글을 쓰고 있었읍니다. 그가 말하는 바는 '이제' (now) 막 끝낸 이 사건이,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롬 1:16-17절에서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노라.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이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한 이유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로마교인 들에게 더 말해 주려고 로마에 가고 싶어 견딜 수 없었습니다.. 또한 그들과 기쁨을 나누고도 싶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로마 교인들에게 전하고 싶어 하는 이 놀라운 기쁜 소식이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오늘 본문 롬 3장 21절에서 31절은 위대한 두가지 주제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첫째 주제는 21~24절에서 ’구원의 길‘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는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께서는 의를 준비하셨는데 이제 나타내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약속하셨고, 이제는 나타나셨고, 계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것이 되는데 그것은 우리의 율법의 행위나 율법을 따른 결과가 아니고, 단지 전적인 믿음을 통해서만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이 길은 모든 자들에게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든 자들, 즉 유대인들 뿐만 아니고 이방인들에게도 열려 있습니다.. 네 번째,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은혜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을 통해서만 그것이 가능하며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이 첫 번째 주제(21~24절)인 구원의 길은 참으로 놀라운 선포이지 않습니까? 그것은 복음의 진수입니다. 그러면, 두번째 주제인 위대한 ’’ 구속의 특징‘에 대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25절로 31절까지의 부분인데 첫째는 구속의 길이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25절과 26절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둘째로 이 길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돌릴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27절과 28절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속하며, 한 조각의 영광도 사람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이 길이 하나님이 모든 세상과 모든 족속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일뿐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29절과 30절의 주장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 길이 율법을 영예롭게 하고 굳게 세우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이 구속의 방법은 하나님의 율법을 조롱하거나 폐하지 않고 그것을 세우며, 어느 의미에서는 율법을 높이 들어 칭송하는 것입니다. 이 본문이 전체 성경 가운데서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부분들 중의 하나입니다. 이 부분을 기본으로 하지 않는 구원의 방법이란 어떤 식으로든지 절대로 언급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은 율법 외에 하나님께로부터 온 의가 나타났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구속 즉 구원의 방식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점입니다.
21절“그러나 이제는 (But now)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義)가 나타났으니”, 1장 17절에서 이미 쓰인"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에 의해 제공된 의, 하나님에 의해 마련된 의, 하나님에 의해 유효하게된 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바울 사도가 1장 12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여러분들은 아마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말하리라고 바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 사도에 의해서 복음은 하나님의 것, 즉 하나님은 이 복음의 창시자시요 이 복음의 주도자시라는 점을 상기하고 있습니다. 정말 븍음에 대한 모든 것은 언제나 제 일 차적으로 하나님의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죄가 결국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기 때문입니다. 죄란 반드시 저와 여러분이 도덕적으로 실패했다든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인정 받기 위해, 우리 자신과 우리의 윤리적 수준이 부족하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의 진짜 문제는 죄가 하나님을 향한 도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지 않는다면, 우리는 죄에 대한 바른 개념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죄의 바른 개념은 복음전도의 출발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자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이고, 구원은 하나님께 대한 화해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일은, 구원의 길을 제공하신 분이 하나님 자신이시며,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제공하신 이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을 보내셨고, 그에게 그의 사역을 부여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벧전 3:18절에서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의 모든 목적과 의도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려는 데 있다 했습니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그가 행하신 모든 일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즉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사람들을 이끌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은 자기까지만 와서 멈추라 하지 않고, 그는 우리를 아버지께 데리고 가서 아버지와 화목시키는 것입니다. 성부하나님은 복음을 계획하셨고, 성자 하나님은 실행하셨고, 성령 하나님은 성자 그리스도가 하신 모은 일들을 믿게 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겸손과 사랑과 상호 연합의 신비를 보게 됩니다. 할렐루야! 구원의 방식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 다음은, 그것이 창세 전의 영원 전부터 계획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 점을 3장 21절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복음은 율법이 사람들을 구원하지 못하자 하나님께서 그제야 생각해 낸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20절 말씀은 율법을 통해서는 결코 어떤 사람도 구원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었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복음은 창세 전에 작정되었습니다.. 그 이유인즉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복음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을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율법 즉 모세 오경 가운데 복음이 있는 것입니다. 선지서들 가운데서도 복음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얻은 것이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라고" 한 언약에서 그것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곳에서 율법의 증거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 주님 자신이 “아브라함은 내 때를 바라보고 즐거워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창세기 17장에 기록된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할례 사건은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에 대한 일종의 예표입니다. 창 22장에서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죽이려고 하는 그 순간, 하나님이 이삭 되신 미리 준비하신 숫염소는 희생제물이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입니다. 그것은 그와 그의 후손을 인하여 온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는 약속 가운데서 한층 분명히 나타납니다. 다시 복음은 의식법에서 나타납니다. 레위기에서 아주 뚜렷하게 묘사되었읍니다. 번제와 희생 제물과 소제와 화목제 등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며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행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영단번에 “그의 독생하신 성자 안에서 행하신 이"일을 증거 하는 율법입니다. 시편에는 많은 예언이 들어 있습니다. 제22편에서 ”아버지여 왜 나를 버리십니까? “라는?“ 구절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완전한 묘사입니다. 이사야 7:17절에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라는“ 말은 동정녀 탄생에 관한 예언입니다. 예레미야에서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하리라 ““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선자자들은 그것을 증거하고 있었으며, 미리 예언하고 있었습니다. 다니엘서 중 특별히 9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주님이 오실 정확한 기한을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다니엘은 이 메시아가“다른 사람을 위해 죽음"을 당할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표적인 말입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나와 있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의 의심 많은 제자들에게 모세의 책으로부터 시편과 선지서들을 통하여 주님 자신과 관계있는 모든 내용들을 어떻게 가르쳐 주셨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눅 24:25-27”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눅24:2624: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눅24:2724: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 복음 즉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실 일은 모두 구약에 예시되었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의 죽음, 그의 부활, 그 모든 것이 구약 성경에 있습니다.. 이 점은 우리들에게 성경의 두 짝을 항상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또한 신 구약을 함께 연구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도 알려줍니다. 신약의 븍음이 구약의 예언의 성취라는 것을 나타내 주지 않는 구원의 설명은 어떤 것이든 참으로 부족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사람들은 구약의 많은 부분을 부정하고 비평합니다. 신학적 자유주의 자들은. 아, 우리는 복음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구약은 하나님과 그의 사랑에 대한 고대인의 견해이다. 왜냐하면 희생에 관한 교훈, 피에 대한 가르침, 그것은 율법주의이며 유대주의 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구약을 거부하고, 복음이 그것과 전혀 배치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한 설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진노의 교리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진노와 그리스도의 피의 교리를 부인하면 구약도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하는 바울 사도의 가르침을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말대로 복음은 “구약에 감춰어 있고 신약에 나타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비극은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인데도 성경을 읽었지만 복음을 알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은 나타났고 더 확실하고 충만하고 영광스럽게 확증되었습니다. 이 3장 21절로 31절까지의 모든 말씀은 복음의 표현에 대한 권위입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것은 이제 실제적으로 실현되었습니다. 초대 교회로 하여금 구약과 그들의 새로운 책인 신약을 한데 묶게 하신 이는 성령이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기억할 것 꼭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데려다주는 몽학선생 즉 가정교사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한 가지로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며, 그 필요를 채우시기 위해 주님이 오실 것을 예표해 줍니다. 율법은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일을 하는데 그것은 죄를 선고하여 구원의 길을 인도하는 일입니다. 율법의 기능은 “너는 율법 앞에 죄인이다. 그래서 너를 구원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산다.”입니다. 율법의 사역을 도외시한 어떠한 구원에 대한 견해도 참으로 부족할 뿐입니다. 율법을 외면한 설교는 윤리설교, 번영신학, 기복신앙으로 변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를 위해 행한 모든 일은, 우리를 율법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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