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롬 3:19-20
2. 명제: 종교적인 사람에게도 복음이 필요하다.
3. 제목: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신다.
롬 1장에서 바울은 이방인 즉 비종교적인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거부하고 스스로 택한 불경건과 불의에 넘겨졌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방인의 세계와 삶의 양식에 대한 바울의 비판을 들은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거침없이 바울을 지지했을 것입니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로마서 1장 28~32절을 유대인들과 똑같은 식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방탕하고 부도덕한 이방인들에게 진노하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에겐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우리는 그 말씀대로 산다. 우리는 정죄받지 않는다." 이제 바울은 1장에서 폭로된 이방인의 생활양식을 듣고 자신들은 그들과 다르다며 자기만족에 빠진 유대인 즉 종교인들을 겨냥합니다. 그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롬 2:1~3절" 당신들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 당신들이 비종교적인 사람들을 판단할 때마다. 실은 자신들을 정죄하고 있다." 사실 1장 끝부분의 죄목들은 이방인 즉 비종교적인 사람들의 우상뿐 아니라, 종교적인 사람들의 우상도 폭로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종교적인 사람 즉 유대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복음이 필요함을 역설합니다. 왜 유대인들 즉 종교인들도 이신칭의 즉 복음이 필요합니까?
1. 유대인들이 복음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유대인 바울의 비극은 모든 것이 잘 되었다고 인식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 바울은 율법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준 대로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 할례의 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자동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롬 2장 25절에서 바울은 그런 생각이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 할례가 되었느니라 " 다른 말로 하면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노골적으로, 28~29절" 그러므로 겉모습만 유대인은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유대인이 아닙니다. 몸에만 행해진 할례는 진정한 의미에서 할례가 아닙니다. 마음으로 유대인인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서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율법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마음에 받는 할례가 진정한 의미의 할례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할례를 의지하는 모든 유대인의 생각을 뒤엎었습니다. '나의 부모가 그리스도인이니 나도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똑같은 것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국적이나 어떤 인간적인 연관성에 의지하는 모든 것은 할례에 관한 이 역설 때문에 완전히 배제됩니다. 그러면 율법에 관해서는 어떻습니까? 롬 2:13 절에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 율법이 모세를 통해 주어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만일 네가 이것을 지킬 수 있다면 그것이 너만 구원한 것이라. 이것들은 행하는 자는 그것들로 인하여 살리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유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론 율법이 주어지지 않아서 율법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 사람들은 법 없는 자들이며, 개들이요, 하나님이 없이 사는 자들이요, 약속과는 무관한 자들이라 그들은 어떤 소망이 없는 자들이라. 그러나 우리는 율법을 가지고 있으며 율법과 친숙해 있노라. “유대인들의 생각에는 자신들이 율법을 알고 있는 것 자체가 자기들을 구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2:17-20절에서 "자신을 유대인이라 부르는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은 모세의 율법을 의지하여 하나님과 사귄다고 자랑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알며 율법을 배웠기 때문에 무엇이 옳은지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가 앞 못 보는 사람의 인도자요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의 빛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이것은 자기들의 도덕성을 의지하는 오늘날의 모든 사람의 입장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보혈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것을 반대하며 조롱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은 말하기를 자기들은 선을 행하고 있으며, 그들은 착한 사람들이며, 고상한 사람들이며,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선생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의 질문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21~24절" 그러면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가르치면서 왜 여러분 자신은 가르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에게는 도둑질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 여러분 자신은 왜 도둑질합니까? 간음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여러분은 왜 간음합니까? 우상을 미워하면서 여러분은 왜 신전에 있는 물건을 훔칩니까? 율법이 있다고 자랑하면서도 그 율법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까닭은 또 무엇입니까? 너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 사이에서 욕을 먹고 있다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과 어쩌면 그렇게도 똑같습니까?” 유대인들에게, 특별히 유대의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였던 바리새인들에게 문제 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바울 자신이 회심하기 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그들은 자신을 율법에 대해 전문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율법을 소유하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나라의 법률에 대해서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을 위반한다면 그 법률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법정에서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이란 지켜져야 하며 실생활에서 실천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둘째로, 그들은 율법 조문의 주요 부분을 지키는 이상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이라는 인상을 받고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약 2:10절“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율법의 99%를 지켰다고 말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만일 1%를 지키지 못했다면 전체 율법을 어긴 것이며 또한 율법을 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점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좀 더 심각한 것은 그들이 의문 즉 문자에는 전문가였고 정확하였는데, 영 즉 율법의 정신에는 그렇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뽐내기 좋아하는 바리새인이 '저는 살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우리 주님은 잠깐만 기다려라. 네가 이르기를 너는 결코 살인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그러나 나는 너에게 말하노라. 누구든지 이유 없이 형제에 대하여 성내는 자마다 재판을 받을까 두려워할 것이요, 자기 형제에게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넘겨진 것이요, 형제더러 어리석은 자라하는 자는 지옥불에 던지우리 라고 우리라고 답변하신 것입니다. 만일 형제를 어리석은 자라 부른다면 마음에 그 형제를 살인한 것이요, 율법의 기준에서 살인죄를 지은 것이 됩니다. 주님은 간음에 대해서도 같은 식으로 말씀하십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간음치 말라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바리새인은 의문과 나타난 행동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간음을 행치 아니하였읍니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네게 말하노라. 누구든지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은 자마다 마음속에서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바울은 주장합니다. 의문 즉 문자와 영 즉 정신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마음 안에서 범죄했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간음한 죄를 지은 것입니다. 또 다른 가장 중요한 점은 탐심의 문제입니다. 롬 7장에서 바울이나 바리새인들은 그전에는 탐심의 의미를 깨달은 적이 없었습니다. 7절'내가 탐심 하지 말라 하는 율법이 없이는 탐심을 알지 못하였노라.‘ 그가 죄를 범하지 않는 한 그는 무죄하다고 생각한 것이 유대인 바울의 비극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마음속에 있는 욕심은 탐심이란 범행만큼 못된 일이며, 정욕이란 겉으로 나타난 행위만큼 몹쓸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셨을 때, 바울은 그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 바울은 그 전에는 율법의 참된 의미를 결코 깨달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자기는 하나님 앞에서 율법의 소유자이므로 의롭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익이 그들에게 도움이 됐습니까? 롬 3: 19-20절 안에 있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율법에 기록된 내용은 그 무엇이 되었던 율법 아래 사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변명할 말이 없게 되고 온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바울은 복음을 사랑스럽게 여깁니다. 그 이유는, 복음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입니다.. 여기서 그는 동일한 관점인 ”모든 세상"이라는 말로 결말을 맺습니다. 그는 모든 세상이 하나님의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을 내내 주장해 오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이 뜻하는 참다운 목적은 '모든 입을 막게 하기 위함,, 즉 변명할 말이 없게 하기 위함'이란 것을 지적합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당신이 입을 다물고 있는지를 보면 압니다. 비그리스도인의 문제는 그가 계속 지껄인다는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이것도 모르고 저것도 몰라. 그러나 결국 나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지.' 그는 여전히 지껄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에 관해 말하며 하나님을 비평하며, 거드름을 피우며 이야기하길 '왜 하나님은 이러저러한 일이 일어나게 내버려 두시는가?' 등의 질문을 내뱉곤 합니다. 당신의 주장을 내걸고 당신의 모든 의를 내 보이십시오. 그러면 율법은 그 모든 것을 쓸모없는 ’지푸라기‘이며 '더러운 넝마'와 '썩은 흙'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할 말이 없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의 입은 닫혀 있습니다. 그것이 율법이 하는 일인 것입니다. 롬 3:19절 '누구든지 변명할 말이 없게 되고 온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됩니다.' .' 바울은 이 점을 다시 반복합니다. 롬 3:20절“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죄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며 자기 의를 내세우는 바리새인과 같은 현대의 도덕적인 사람은 자기가 행한 것과 범하지 않을 계율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그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렀느뇨?' 그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습니다. 왜 유대인들도 즉 종교인들도 복음이 필요합니까?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문제는 율법의 기능과 목적에 관한 잘못된 개념 때문에 일어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 율법을 주셨습니까? 그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답변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것이 결코 아니란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고 말씀하시되, 너희들이 온 힘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이제 율법을 지키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내 앞에서 너희가 구원받을 그것이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그런 이유로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 안에 있는 인간이 그것을 지키기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롬 8 : 3절에서 "율법이 죄의 본성 때문에 연약하여 할 수 없었던 것을 하나님께서는 죄를 없애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사람의 모양으로 보내심으로써 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 속에 거하고 있는 죄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우리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이유는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의 가공한 성격에 대해 알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도덕적인 우월감에 있는 윤리 주의자들은 '내적인 생명력'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할례, 세례, 직분, 교인 증명서 따위의 표시가 아니라 그 표시가 의미하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롬 2 : 28-29절“몸에만 행해진 할례는 진정한 의미에서 할례가 아닙니다. 마음으로 유대인인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서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율법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마음에 받는 할례가 진정한 의미의 할례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습니다." 할례 받은 마음이란 영적으로 감화를 받아 부드러워진 마음입니다. 어쩔 수 없이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선하심을 느끼기 때문에 그분에 대한 사랑으로 생명력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할례가 언제 시작되었습니까? 모세의 율법보다 훨씬 앞선 유대인의 조상이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시대에 시작된 율법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창 15: 5-6절“ 아브라함아, 하늘의 별을 보라 네 자손이 하늘의 별같이 많아지리라..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믿으니 그 믿음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의롭다 여기셨습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 친밀한 내적인 믿음의 관계에 대한 표시를 주셨을 때 창 17: 9-14절"너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할례가 상징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언약을 깨뜨리는 것에 대한 처벌을 보여 주는 표시였습니다. 고대에는 계약을 맺을 때 서명을 하지 않고, 대신 언약을 깨뜨리면 받게 될 저주를 연기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래를 한 움큼 집어 자신에 머리에 뿌리며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오늘 맺은 약속을 어기면 나는 이 먼지처럼 될 것입니다." 혹은 동물을 반으로 가르고 그 사이로 지나가면서 말했습니다. 창 15:9-21절" 만약 내가 이 언약을 어기면 이 동물같이 죽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을 때 보여 주신 방법입니다. 할례는 매우 친밀하고 개인적이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육체의 포피를 자르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와 관계를 맺고 싶다면 네가 언약을 깨뜨리면 완전히 단절되리라는 것을 너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에게 보여 주는 표시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 언약이 깨지면 너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생명으로부터, 나로부터 단절된다. 너는 정말로 떨어져 나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언약 즉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도대체 누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할례가 의미하는 '단절'은 이미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육체적으로 할례 받지 않은 골로새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골 2:11절 "그스도를 믿었을 때 여러분은 새로운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손으로 행하는 육체적인 할례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해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그들이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로 할례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통해 모든 것으로부터 끊어지셨습니다. 막 15:34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 그분은 참으로 할례 되었습니다. 언약을 깨뜨린 자가 받는 저주를 십자가에서 받으신 것입니다. 그는 종교적이든 비종교적이든 율법을 지키지 않은 자들이 받아 마땅한 저주를 대신 받으며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을 믿는 우리도 예수 안에서 할례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이 우리 안에서 임하시어 우리에게 예수님의 할례를 주십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구원을 덧입히시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믿음을 주시어,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정죄의 대상이 아닌, 롬 2:29" 칭찬의 대상으로 보십니다 “ ”너는 의롭다, 죄가 사해졌다 ““ 우리 스스로 칭찬할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 살아갈 필요도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우리를 아름다운 존재로 보십니다. 우리의 '단절들'을 짊어질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위해 이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 대신 단절됨으로 즉 저주를 받음으로, 그를 믿는 죄인인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시어, 할례 즉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내 안에 계신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써, 육신이 할 수 없었던 무거운 율법의 요구도, 믿음으로 나아가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쁨으로 할 힘을 얻어, 예수님 닮아가는 성화 구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롬 8:4절” 이렇게 하여 죄의 본성에 따라 살지 아니하고, 성령에 따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율법의 의로운 요구들이 완벽히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예수 믿는 자에게 주신 이신칭의의 크신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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