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계4:1-2
2. 명제: 현 세상의 역사를 바로 이해하려면 성경 계시를 통한 성령의 음성을 먼저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명령적 명제
3. 제목: 역사에 대한 올바른 관점
오늘 본문에서 저는 특히 이 구절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계4:1-2절"계 4:1-2절"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미래에 대한 전망, 곧 역사를 미리 내다보고 싶은 욕망은 단순한 호기심의 문제가 아니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너무나 불확실하고 무서워서 사람들은 당연히 미래를 염려하게 됩니다. 최첨단 과학 시대라고 자부하는 오늘날, 부산 해운대 바닷가로 가는 중심가에는 사주, 팔자, 운명, 타르를 보는 점집이 절 비합니다. 주 고객이 젊은이들 같습니다. 미래에 대한 염려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염려는 지금과 같은 전 세계적인 불안과 국내의 혼란과 불경기 시기에 더욱 극심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미래 역사의 전망을 제시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말하는 것뿐입니다. 단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다고 추측할 뿐입니다. 그들은 결코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와 편견과 사상을 뛰어넘지 못합니다. 지난 19세기 사람들은 미래를 전망하기를 특히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과학, 산업의 발전으로 다가올 시대, 곧 각종 연합기구가 생기고 세대를 거듭할수록 지식이 증가하며 사회적 협약의 결과 때문에 인류가 획기적으로 도약하는, 그런 시대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황금시대의 도래를 자신 있게 예고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이 20세기에 일어난 일, 이차 대전으로 허황한 예측이었음을 입증하는 수많은 사건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는 역사의 전망에 대해 어느 정도 회의적인 입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모든 노력과 예측이 실패로 판명된 것과 그들이 한결같이 요한계시록의 원리들에 무지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역사에 대한 전망을 얻고자 한다면, 먼저 나팔 소리 같은 음성으로 '이리로 올라오라'라고' 하는 성경의 권고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이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 사도가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역사의 전망을 얻게 된 방법입니다. 여러분은 사도 요한이 계시를 통해 보고 들은 것을 이 책에 기록하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현재 일어나는 사건들에는 새로운 것이 없다는 점입니다. 이 일들은 모두 예전에 일어났던 일들입니다. 요한은 끔찍한 로마 제국 시대의 황제 우상 숭배와 전쟁과 박해와 시련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무서운 일들이 이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러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요한은 그와 같은 세상의 한가운데에서 교회에 대한 염려와 성도 개개인들의 문제가 그를 무겁게 짓누르는 상태에서 이 역사의 전망을 보게 되었으며,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려는 의도에서 이 책을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에 기록된 메시지들을 통해서, 우리는 역사에 대한 올바른 시각이 어떤 것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현 세상의 역사와 내 삶의 미래를 바로 이해하려면 성경의 계시를 통한 성령의 음성을 먼저 듣고 순종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역사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관점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 원리는 전체적인 시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요한은 사도였으며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지상에 있었기에 역사에 대한 전망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그는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계4:1절“계 4:1절“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그리고 '곧' 요한은 2절"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우리는 여기에서 역사에 관한 어떤 원리들을 끌어낼 수 있습니까? 첫 번째 원리는, 인류와 세상 역사를 올바로 이해되려면 언제나 그것이 전체로서 조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역사를 조각으로 간주하는 위험에 끊임없이 빠지기 쉽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우리 자신이 속한 역사의 한 단편에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우리의 많은 생각이 오류에 빠지고 맙니다. 그것이 진정 지난 100년 동안의 큰 문제였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말해 왔습니다. "물론 과거에는 많은 일이 일어났었지만, 이제 세계는 달라졌어." 그들은 우리가 새로운 세계에 살고 있으며, 우리의 시각과 정신 구조가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와 임박한 미래에 대한 그들의 시각은 오로지 현재의 관점에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역사의 어느 부분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을 전체의 맥락 속에 두어야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요한계시록을 읽어 보면, 언제나 광범위한 시야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말하고자 할 때, 그것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됩니까? 바로 하늘입니다. 성경은 그런 방식을 선호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족보를 대할 때, 그것이 종종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바라보지 않고는 현재의 문제를 바로 볼 수 없습니다. 역사는 전체적으로 간주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 시대의 시각으로만 우리 시대의 역사를 이해하려고 시도한다면 반드시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나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방법을 택한다면, 비로소 빛이 비치어 우리의 문제들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많은 현대 사상가들이 믿고 있는 것과는 달리, 한 시대가 이전의 시대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성경은 인류의 전 역사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간주합니다. 진정으로 역사의 일면이라도 제대로 보기를 원한다면, 성경이 말하는 대로 '이리로 올라와야 ‘‘ 합니다. 하늘로 올라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이 세상의 역사와 내 삶의 미래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관점이 무엇입니까?
두 번째 원리는, 인류의 이야기는 인간의 관점만으로는 결코 이해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을 숭배해 왔습니다. 또한, 우리는 인간의 능력이 끝이 없으며 거의 무한하다고 여겼습니다. 우리는 인간을 중심에 두었습니다. 사람들은 동물학적,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존재 등으로 인간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이르러서, 인간을 설명하려는 이러한 다양한 시도들이 전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부적절함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인간의 관점으로만 역사를 설명하려고 시도한다면, 인간의 고유성을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난 세기 동안 인간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었던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시간이 흐를수록 위대한 과학자들이 인간의 고유성이 설명될 수 없는 것임을 인정하고 고백했음을 주목하십시오. 최상의 고등 동물과 최하의 인간 사이에도 본질적인 격차가 존재합니다. 인간의 고유한 특성은 인간의 관점만으로는 도무지 설명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에게는 기이한 모순이 발견됩니다. 인간이란 얼마나 이상한 존재인지요. 인간에게는, 종종 셰익스피어의 말이 옳다고 느껴지는 그런 요소가 있습니다. "인간이란 얼마나 걸작품인가! 그 얼마나 고매한 이성을 지니고 있는가! 얼마나 무한한 재능을 소유하고 있는가! 그 외모는 마치 천사와 같도다." 지난 시대는 이런 식으로 인간을 이상화하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인간을 지적이고 이성적이며, 인류의 향상을 위해 매진하는 순수한 이상주의자로 생각했습니다. 마침내 하늘에까지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 간주했습니다. 인간이 아주 놀랍고도 고상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에 관한 진실 전부는 아닙니다. 인간은 그와 동시에 동물조차 절대 하지 않는 짓들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편협함, 추함, 더러움, 악함이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영웅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 다를 때에는 악당처럼 행동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비열한 짓을 행하기도 합니다. 오, 인간의 모순이여. 위대함과 천박함이여. 인간은 천사처럼 되기도 했다가, 짐승보다 못하게 되기도 합니다. 성스럽고도 영원한 것과 연결되기도 했다가, 때로는 얼마나 짐승 같은 속물이 되어 버리는지요. 우리가 과거의 역사를 전적으로 인간의 시각으로만 본다면 그것은 간단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예를 들겠습니다. 유대 민족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사람의 관점으로만 관찰할 때 이스라엘의 역사를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그 민족과 특히 구약에 기록된 그들의 역사를 관찰하십시오. 유대인들의 고유성과 구별성, 그들의 특성을 고려해 보십시오. 성경이 우리에게 자주 들려주듯이, 그것은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많은 방면에서 그들은 오히려 더 나빴습니다. 그런데도 그 민족이 행한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의 시편과 선 지서들을 읽어 보십시오. 어떻게 이 유대 민족이 유일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점에서 그토록 두드러졌는지를 주목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유대인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너희가 내 백성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를 위해 이 일을 행하였으나, 그러나 그것은 너희 때문이 아니요, 오직 나 자신의 위대한 이름 때문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반역하였으며, 그분의 율법을 어겼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여전히 구별된 백성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차원에서만 본다면 결코 설명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단순히 능력과 이성의 차원에서 본다면, 유대인들은 헬라인들과 견줄 수 없습니다. 유대 민족은 헬라 민족이 배출했던 것과 같은 위대한 철학자들을 배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도 독특한 민족은 유대 민족입니다. 신약성경으로 눈을 돌려 나사렛 예수가 어떻게 부각되는지를 주목해 보십시오. 오늘날의 세계는, 혹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분이 세계 역사상 가장 특별한 인물이라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인류의 역사 전체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인간의 시대 자체가 그리스도 이전(BC)과 이후(AD)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세계의 역사 전체가 이 한 분에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분의 삶과 가르침, 그분의 죽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의 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것들은 인류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것을 인간의 관점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나사렛 예수의 출생과 생애와 죽음을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다 설명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위대한 역사적 사건들은 인간의 관점으로만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를 무산시켜 버립니다. 그 이상의 무엇, 위에서부터 비롯되는 초월적인 그 무언가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위대한 활동을 주목해 보십시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이 일들이 세계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요. 마틴 루터와 존 칼빈과 종교 개혁이 없었더라면, 역사는 지금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인간의 관점으로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정녕 역사가 순전히 인간의 이야기였다면, 인류 역사에 있어서 이 위대한 부흥의 시기들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언제나 쇠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중국과 이집트의 위대한 문명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의 지식이 얼마나 뛰어났었는지요. 그러나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에게는 언제나 쇠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빛을 흐려지게 만들고, 얻었던 지식을 잃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언제나 아래로 내려가려는 것이 인간의 성향인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상승기로 특징지을 수 있는 시기에는 인간의 영혼을 각성시키는 성령의 강력한 운동이 있습니다. 역사를 인간의 관점에서만 볼 때에는, 이러한 성령의 운동은 결코 이해될 수도, 설명될 수도 없습니다. 오, 정녕 역사를 이해하려면 '이리로 올라와야’ 합니다.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과 함께 출발하십시오.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볼 때, 역사란 인간의 차원에서의 점진적인 상승의 이야기가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역사는 모든 것이 암울해지고 인간이 흑암 속에 잠기게 되었을 때, 인간의 상황 속으로 끊임없이 개입하시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역사는 영어로 history입니다. history는 his + story 즉 그분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시고 인간의 상황에 개입하십니다. 그것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리로 올라오십시오.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십시오. 역사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관점이 무엇입니까?
세 번째 원리는 계시를 통해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은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세계와 세상 역사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가 듣고 본 계시를 보십시오. 1~2절"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사도 요한조차도, 그가 곧 성령에 감동되지 않았더라면, 그것을 볼 수도 없었고 기록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역사는 과거의 역사를 분석함으로써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계시의 영역을 수용함으로써 이해됩니다.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인간에 대한 계시를 수용할 때에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사는 시대를 이해하고자 하고, 또한 앞으로 다가올 여러분의 미래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복종하고 이 성경책을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이해와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영원하고도 초월적인 영역, 기적적이고도 절대적인 영역을 인정해야 합니다. 헬라인은 무엇이든 자신의 지성과 총명으로 설명할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 일은 자연인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 일은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인간과 세상 역사를 이해하는 열쇠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해력과 능력에 머물러서, 우리 자신의 이성만으로 이해하려고 애쓴다면, 전도서의 지혜 자가 말했듯이 그 모든 노력은 허사입니다. 전 1:2절"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회의주의자나 냉소주의자처럼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무 의미도 없어." 강은 바다를 향해 흐르고, 다시 그 원천으로 되돌아갑니다. 태양은 뜨고 지고 다시 떠오릅니다. 모든 것이 지금처럼 있었던 것입니다. 지혜를 찾는 일은 허사가 되어 버렸고,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라고 말합니다. 아무런 도움 없이 우리 자신의 노력만으로 삶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다른 길이 있습니다. 역사의 의미, 삶의 의미와 목적,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의미가 계시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성경의 계시를 통하여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이 성경의 위대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위로부터 펼쳐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바로 듣고, 보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우리의 무능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이해력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아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입문이라고 저는 말씀드립니다. 그것은 전체로서 간주하여야 합니다. 미래와 내 삶의 미래와 세상 역사의 의미를 이해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십시오.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에 복종하십시오. 말씀 충만이 성령 충만입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통한 성령의 음성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요한 사도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성령 충만을 받을 것이며, 그때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현 세상 역사와 우리의 미래도 정확하게 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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