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롬 11:1-27
2. 명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 결코 오만해서는 안 됩니다. (평가적 명제)
3. 제목: 접붙여진 가지
갈등: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하나님은 믿음을 통해 구원하실 사람들을 택하십니다. 하나님과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책임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자신들의 책임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택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로마서 9-10장의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1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버리셨는가? 아브라함과 다윗뿐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신 약속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의 마음을 당신께로 돌리지 않으실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완전히 포기하셨는가? 아닙니다! 바울은 곧바로 그렇지 않다고 힘주어 대답하며 로마서 11장에서 그 이유를 상세히 밝혀 줍니다. 요컨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모든 이스라엘이 믿지 않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바울은 11장 장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네 가지 논증을 제시합니다. 1절에서 바울의 논증은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나를 보라! 나도 예전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던 완악한 사람이었다. 나 같은 사람도 포기하지 않으셨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버리셨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나를 택하셔서 당신의 구원 사역을 힘차게 이루도록 하셨다." 2절에서 택하심의 논증은9장에서 "미리 아는 것"에는 '미리 보는 것‘까지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당신을 믿는 백성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사람들이 믿음에서 떨어질 수는 없습니다. 2-4절에서 엘리야의 논증은 엘리야는 한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단념하셨고, 자기밖에는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왕상 19:14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 하지만 하나님은 바울이 로마서 11장 4절에서 강조하듯 엘리야의 말을 반박하십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완전히 거부한 것 같고 하나님도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신 것 같은 때조차 영적인 이스라엘인 "신실한 남은 자들”이 존재했습니다. 5-6절에서 사람들은 엘리야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모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렸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6절"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믿을 만하고 선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있기 때문에 신실한 남은 자도 늘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믿는 자들을 남겨 두십니다. 이처럼 바울은 두 가지 비유를 들어 "택하심의 은혜'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의 이야기와 엘리야의 예를 들어 하나님이 전적인 은혜로 신실한 남은 자를 택하신다는 것입니다.
2. 갈등 심화: 이스라엘이 의를 얻지 못한 이유
7절"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9:6"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다시 말해 이스라엘 민족 전체나 대다수가 아니라, 바울과 같이 소수의 믿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의를 얻은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비록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의를 진지하게 구했지만, 대다수가 행위를 통해 의를 구하려 했습니다. 반면 택하심을 입은 소수만이 이 의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11장 7절에서 바울이 한 말을 이렇게 바꾸어도 될 것입니다.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를 진지하게 구하긴 했지만 잘못된 방법으로 구했다. 그 결과 대다수의 사람들은 완악해졌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완악함은 은혜의 메시지를 거부한 교만함에 대한 벌로써 '법의 심판을 받은' 완악함입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완악해지면, 하나님은 그들을 완악한 채로 버려두시고, 8절“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습니다" 바울이 인용한 8절의 이사야의 말씀은 사실 신명기에 나오는 모세의 말을 바꾸어 말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이 반역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영적인 소경으로 만들 것이라고 모세는 경고했습니다. 이사야는 '오늘까지' 그런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고 말하며 이스라엘을 꾸짖었습니다. 교만과 자기중심성은 완악함을 낳습니다. 하나님을 뿌리치면 하나님께 버림받게 됩니다. 어찌 보면 그것은 당연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뿌리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썼던 사람들로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뿌리치고 스스로 완악해져 버렸다는 바울의 진술은 참으로 충격적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완악한 사람이란 아무런 노력 없이 의롭다 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복음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며 이해할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는 모습입니다. 은혜에 대해서는 필사적으로 거부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섬기는 데는 죽을힘을 다하다니 실로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은 거룩하고 위대하신 분이라 어떠한 악도 용납하지 않는다고 단정하곤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기로 결심합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거저 얻는다는 생각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유죄를 선고받은 살인자가 회개한다는 몇 마디 말로 수년간 올바르게 살기 위해 애쓴 사람처럼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이룰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것은 얼마나 비논리적이며 하나님의 의를 업신여기는 것인가!" 이들에게는 복음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모욕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은 옳지만 그 진지함을 넘어 복음이 하나님의 의에 걸맞지 않다고 결론짓는 식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간절한 갈망이 자신의 노력과 능력에 대한 무의식적인 교만과 합쳐지면,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이며 완악해질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복음이 사람들의 도덕적인 노력을 약하게 만든다고 인식합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서려고 성실하고 진지하게 노력하지만, 도리어 올바르게 서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뿌리쳐 버립니다. 오늘 날 교회 안에서도 주로 두려움과 죄의식,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이용해서 율법주의 적인 교인들로 이끌어가는 교회에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3. 전환: 이스라엘의 미래
그렇다면, 11절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또한 하나님의 보응으로 인해"넘어지기까지 실족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대답은 '그럴 수없느니라'입니다. 사실 유대인과 이방인이 복음을 받아들인 방식은 이방인뿐 아니라, 유대인도 믿게 되는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의 일부분이었습니다. 11-12절에서 첫 번째 단계로 이스라엘은 넘어졌지만, 그로 인해 이방인들에게 구원이 주어졌습니다. 흥미진진하게도 적지 않은 유대인들이 믿었지만,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기독교에 대해 상당히 적대적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초대교회의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것으로 쉽게 단정 지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민족에게 복음을 전할 동력도 남아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12절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된 것입니다. 11절에서 두 번째 단계로 이방인들은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만들었다.” 바울은 사역의 목표 가운데 하나가 자신의 골육을 14절“시기 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대개 우리는 시기심을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누가는 복음 전도를 통해 사도들이 칭찬을 얻고 그 영향력이 커진 것을 유대인들이 시기했다고 증언합니다. 바울이 여기서 기술한 시기심이 어떤 종류인지는 존 스토트의 글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시기심이 불만족이나 죄 된 탐욕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항상 이기심으로 얼룩진 것은 아닙니다. 간단하게 말해 시기심이란 '다른 사람이 소유한 어떤 것을 자신도 갖고 싶은 욕망'입니다.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는 욕망하는 대상이 무엇이고 그것을 소유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만일 그것이 악하다거나, 다른 사람에게 속해 있어서 가질 권리가 없다면 시기심은 죄가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선하고,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누리도록 허락하신 복이라면 그것을 '탐내고' 나아가 그것을 가진 사람들을 시기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 됩니다.” 예를 들어 옆 교회에서 전도를 열심히 한다는 소문을 듣고, 우리 교회도 옆 교회에 뒤질 수 없다고 경쟁적으로 전도를 더 열심히 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했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대부분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이제 유대인들이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많은 약속들이 이방인들에게 실현되는 것을 보고서, 유대인들도 시기심이 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11장에서 바울이 생각하고 있는 바도 이와 유사할 것입니다. 먼저는 유대인들 덕분에 이방인들이 믿음을 가졌고 그 다음에는 이방인들 덕분에 유대인들이 믿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장차 있게 될 세 번째 단계에 대해 말합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이스라엘의 시기심으로 14절에서 그들 중에서 얼마를 얻는 데 그쳤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12절에 이스라엘이 더충만 하게 받아들여지는 그날을 상상합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은 25-27절을 읽어 봅시다. 바울과 같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질 것이라는 표시입니다. 이어서 바울이 13절"이방 사람인 여러분에게 말합니다"라고 말하는 대목을 유의해서 봅시다. 그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옛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로마 교회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주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초대교회 공동체와 오늘날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다음과 같은 명백한 도전에 직면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셨던 모습을 지닌 공동체를 세워가고 있는가? 독실한 유대인들이 우리의 교회를 보고 시기심이 생겨 복음에 귀를 기울이고 싶겠는가?" 오늘 나의 신앙을 보고 이웃이 나도 예수 믿고 싶다는 매력을 주고 있는가?라는? 도전에 답을 해야 합니다.
4. 대단원: 접붙여진 가지
16절에서 바울은 당시 유대인 신자들을 앞으로 생겨날 수많은 믿음의 가지를 약속하는 뿌리에 비유합니다. 이어 17절에서는 올리브나무의 비유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약학자인 윌리엄 램지의 설명에 의하면, 특별한 경우에 더 이상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감람나무에다 돌 감람나무의 어린 가지를 접붙여서 되살리는 것이 관례입니다. 감람나무뿌리에서 올라온 수액은 돌 감람나무의 가지를 고귀하게 만들고 이제 감람나무는 다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런 원예학적인 설명은 바울의 대표적인 은유입니다. 돌 감람나무 가지는 활발하게 성장하지만 자양분을 얻을 수 있는 나무에 접붙여질 때만 생명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동시에 겁불여진 가지는 온 나무를 새롭게 하여 다시 생명이 순환하도록 합니다. 바울은 이 은유를 특별히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합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은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접붙여진 돌 감람나무의 가지들이다”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이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생명의 복음을 의미하는데, 이스라엘의 선조인 아브라함 이래로 소수의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지 않는 유대인들, 18절에서 곧 '꺾인 가지들'을 절대로 멸시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방인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이 지녔던 성경의 진리로부터 혜택을 받았음을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무에 접붙여졌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짐으로써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들을 물려받았습니다. 이방인들이 한 것은 다만 성경의 역사와 이스라엘을 통해 얻은 약속들 가운데 들어왔다는 것뿐입니다. 18절"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이방인이 유대인을 업신여기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쓰는 성경도 그들에게서 왔고, 예수님도 유대인이셨습니다. 20절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교만하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고 말합니다. 19절"(유대인)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이방인) 접붙일을 받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처럼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도 기회가 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유대인들보다 자신들이 더 합당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20절 자신들도 믿음으로 접붙여졌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거부했을 때 21절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이방인도 아끼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겸손하게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22절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자하게 대하실지 아니면 준엄하게 대하실지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지 믿지 않는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직 은혜로 택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의롭게 되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또한 우리의 구원이 너무나 확실해서 하늘과 땅에 있는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롬8:38-39“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렇다면 왜 그는 20절에서 "두려워하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일까요? 바울이 말하고 싶은 핵심은 믿음이 주제넘는 과신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유대인들에 대해 일관되게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이 택하심을 받은 민족이긴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최고의 민족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라는 자부심이 지나쳐 어떻게 살든 ’’ 하나님이 자기들 '안'에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경고합니다. "여러분은 유대인들처럼 주제넘게 자신을 과신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22절”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고합니다.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아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그날까지 예수님을 지속적으로 닮아 가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죄를 짓기 시작하면, 또한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물론이고 심지어 자신이 택하심을 받았는지 조차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21절“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 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이와 같은 바울의 권고가 8장 30절에서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이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가 안전하다고 주장한 다른 본문과 배치되는 것은 아닙니다. 요일 2:19“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요한은 여기서 '구원의 상실'이 아니라 거짓 믿음이 드러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도 같은 맥락입니다. 히 3:14-15"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 결코 오만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접붙인바 된 가지라는 위치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아는 믿음은 예수님을 지속적으로 닮아 가는 것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설교에 대한 이론 > 그리스도 중심적인 네러티브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2) | 2024.06.09 |
---|---|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0) | 2024.05.19 |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2) | 2024.04.07 |
우리 구주 그리스도 (2) | 2024.03.17 |
중생 (1) | 2024.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