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에 대한 이론/그리스도 중심적인 네러티브 설교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wordlove 2024. 6. 9. 14:45

1. 본문: 12:1-8

2. 명제: 복음은 교회 내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하신다. (가능성의 명제)

3. 제목: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갈등: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12장은 새로운 단락이 시작되는 전환점입니다. 바울은 그러므로로 그 서막을 엽니다. 그는 지금까지 설명한 복음을 토대로 예수님을 믿어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121-2절은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삶을 가장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 먼저 순종하는 동기부터 살피봐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동기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1절은 가장 중요한 동기를 두 단어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단어인 "그러므로"는 바울이 로마서 1-11장에서 설명했던 복음이 기반이 되어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어인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역시 본질적으로 같은 맥락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충분한 이유는 은혜에 대한 감사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구원이 절대 잃을 수 없는 것이라는 바울의 탁월한 롬 8장의 주장에 비추어 보면 이것은 특히나 중요합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의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는 것이라면 순종의 주된 동기는 분명히 두려움이 될 것입니다. 대개 비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음 뿐 더러 믿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를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하나님의 정죄를 받을 수 있다고 믿게 된다면 어마어마한 두려움에 휩싸일 것입니다. 두려움으로 하는 순종에는 은혜에 감사하는 긍정적인 요소보다 심판을 두려워하는 부정적인 요소가 더 많습니다. 두려움이 우리를 순종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동기라면 그 결과는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첫째, 시간이 흐르면서 순종하려는 동기가 점점 약해질 것입니다. 두려움은 사람의 감정을 매우 소모시키는 정서로 처음에는 큰 성취를 이룬 것 같지만, 머지않아 피폐해질 가능성이 큽니다. 큰 두려움 속에 지내게 되면 차츰 마음이 무감각해지고, 서서히 지쳐서 결국 무슨 일이 벌어지든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에 근거한 신앙은 오래 가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둘째, 두려움에서 비롯된 순종은 환난이나 역경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두려워서 순종하는 사람은 고난이 닥칠 때 다음 중 한 가지로 반응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벌을 받는구나! 드디어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 내가 선을 넘어 버렸나 보다." 혹은 "이것은 부당해! 이런 나쁜 일들이 생기지 말라고 하나님께 복종했는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동기가 두려움 때문이라면 환난으로 인해 얻는 것은 절망과 쓰라림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어서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1절에서 "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구약 성전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제물을 바치려 성전에 온 예배자를 비유로 들고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 중에 하나인 '속죄제'는 예배자가 제물을 바치고 그 피를 통해 용서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에도 나와 있듯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속죄 제물이 되셨으므로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속죄 제물이 아닙니다. 또 다른 제사로는 '번제'가 있는데 키우는 가축들 중 흠 없고 결함이 없는 최고의 가축을 제물로 태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가축은 매우 비쌌기 때문에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가진 것 중 가장 귀한 것을 바침으로써,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긴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번제는 항상 제물의 전부를 태웠는데, 이는 하나님께 자신의 전부를 거룩하게 바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산 제물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전부를 내맡기는 것입니다. 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 능동적으로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든 기꺼이 순종하겠다는 것이고, 수동적으로는 하나님이 우리 삶에 허락하신 것은 무엇이든 기꺼이 감사하게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을 바칠 것을 촉구하면서 자신이 말하고 있는 전체가 어떤 의미인지 로마 교인들에게 이해시키려 했습니다. 몸은 부정적이고 나쁜 것이며 영은 지성과 영혼을 고양시키는 것이라고 교육받고 믿었던 당시 그리스-로마 사람들에게 이러한 바울의 생각은 너무나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가 순전히 내면적이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전인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입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을 드려서는 안 됩니다. 이와 관련해 존 스토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롬 3:13절에서 인간의 타락상을 폭로하면서 그것이 우리 몸을 통해 드러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었습니다. 곧 혀로는 남을 속이고,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흐르고 입은 저주와 독설로 가득하고, 발은 피 흘리는 데 날쌔고, 그리고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의 고결함도 몸으로 하는 행위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우리는 몸의 지체들을 롬 6:13절'6:13절'의의 도구들'로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발은 하나님의 길을 걸을 것이고, 우리 입술은 진리를 말하며 복음을 전파할 것이고, 우리의 혀로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우리의 손은 넘어진 사람들을 일으킬 것이고, 우리의 팔로는 사랑받지 못한 외로운 사람들을 안아 줄 것이고, 우리의 귀로는 비탄에 빠진 사람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줄 것이고,, 우리의 눈으로는 겸손하게 오래 참으면서 하나님을 바라볼 것입니다. "(living) 제물"은 제물이 살아 있기에 이 일이 계속된다는 의미인 듯합니다. 제물"은 원래 죽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산제물''살아 있는 죽임'이 됩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전부를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순종할 수 있도록 우리의 태도를 끊임없이 새롭게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눅9:23-24"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 예수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이것이 1절에서 "거룩한 삶의 모습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온전히 고결하고 전적으로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2. 갈등 심화: 근본적으로 변화하라

바울은 예수님을 믿어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마음이 새로워져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2"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변화를 받아" 이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두 가지 방식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을 따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바울은 세상을 특징짓는 사고와 감정, 행위의 방식들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자신의 삶과 모습으로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 그런데 흥미롭게도 '본받다''변화를 받다'가 대조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변화를 받다"는 헬라어로 메타모르포오입니다. 바울은 이 말을 고린도후서 318절에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다시 말해 바울이 말하는 변화는 겉으로 어떤 것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속사람이 새롭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속사람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유의합시다. 더욱 지혜롭고 선한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지혜롭고 선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2"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가능해집니다.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로 불꽃이 일어야 합니다. 골로새서 316절을 통해 볼 때 이 말은 우리 안에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풍성하게 하라는 의미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 이상이기도 합니다. 에베소서 423절에서는 "마음의 영이 새롭게 되어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단지 참된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지배하는 영향력의 방향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요즘 쓰는 말로 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상상력"을 사로잡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시며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상상력에 불을 지르고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고전 2:11-14절에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있는 진리를 그렇게 사용하실 때 일어납니다. “.“

 

3. 전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

예수님을 믿어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은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온전한 삶의 모습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그 결과로 자기 자신이나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소망하게 됩니다. 바울은 살전 2:4절에서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복음은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도록 동기를 부여해 줍니다. 우리는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충만하고 완전한 은혜와 사랑을 받습니다. 성령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우리 마음을 바꾸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도록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고백하는 우리 안에서 예수님과 예수님이 이루신 완전한 순종을 보시고 막 1:11절에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이유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우리를 구원하신 사랑에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 주셨기에 우리는 자유롭게 되었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삶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뒤뜰에서 오랜 시간 아들에게 타격 방법을 가르치 준 아버지가 있다고 합시다. 이제 아버지는 타석에서 실제로 야구 경기를 하고 있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전부를 사랑하기에 혹시 아들이 자신의 가르침을 잊어버리고 삼진 아웃을 당한다 해도 그 사랑을 거두지 않을 것입니다. 아들 또한 속상하지만 자신의 경기 결과와 무관하게 자신을 지지해 주는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아들은 간절히 홈런을 날리고 싶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자신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위해서 말입니다. 만일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다면 아버지의 사랑을 얻기 위해 홈런을 치려는 노력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이미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잘하려는 노력 자체가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기게 하기 위해 합리적인 예배를 드리십시오. 바울은 이렇게 사는 것이 1"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라고 말합니다. “영적"이라는 단어의 헬라어는 로기겐을 사용해서 '합리적인' 예배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글자 그대로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긍휼을 생각해 보면 우리 전부를 바치는 것은 과연 합리적이고 논리적입니다. 또한 이 주제를 잘 생각해 보면 우리 삶을 제물로 바치는 것만이 합리적인 반응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긍휼을 제대로 경험하게 되면 자신의 전부를 남김없이 하나님께 바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비합리적이라는 말이 됩니다. 만일 자신의 일부만을 성의 없이 바친다면 그것은 곧 당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하신 일을 주의 깊게 보고 그분이 하신 일을 제대로 듣는다면 반드시 얼음 같은 우리의 영혼이 녹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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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대단원: 어떻게 변화될 수 있을까요?

로마서 121-2절은 예수님을 믿어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은 우리 마음이 기쁘게 되어 자신의 전부를 바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줍니다. 첫째, 하나님의 자비를 봅니다. 여기 자비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자비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행해진 특별한 자비들을 지칭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거룩해지고 싶은 관심이나 열정이 부족하다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대한 깊은 묵상으로 타오르게 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룩하게 살아갈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멈춰 서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보여 주신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우리를 위해 전부를 내어 주신 예수님께 우리가 보일 수 있는 합리적인 반응은 그분께 우리 전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지 않는 것은 무례할 뿐 아니라 주님의 은혜를 분명하게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만큼만 우리를 위해 자신을 전적으로 내어 주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지각 있는 행동입니다! 셋째,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합니다. 세상이나 유행하는 형식적인 도덕적 규범을 본받지 말고 오히려 속사람부터 새롭게 됩니다. 거듭해서 말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이 누구시고 어떤 일을 하셨는지 정기적으로 묵상할 때 가능합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지, 또한 우리가 어떻게 변화되길 원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을 깊이 생각할 때 이루어집니다. 이 일을 이루기 의해 우리는 먼저 복음 즉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능력으로 내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변화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할수록,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없지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