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에 대한 이론/그리스도 중심적인 네러티브 설교

사탄아 물러가라/ 궁극의 적

wordlove 2024. 6. 23. 15:08

1. 본문: 3:13-4:11

2. 명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의 궁극적 원수인 사탄과의 전쟁에서 능히 이길 수 있다. (가능성의 명제)

3. 제목: 사탄아 물러가라/ 궁극의 적

 

갈등: 요즘 세상에서 사탄의 존재는 너무 터무니없지 않습니까?

성경은 예수님과 평범한 사람들의 만남을 살펴보면 그들의 삶이 영원히 달라졌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삶이 영원히 변화되려면 그분을 구주로 만나야 하고, 그러려면 그분이 우리에게 해 주신 일을 보고 알아야 합니다.

 

2. 갈등 심화: 세상을 바꾼 두 사건

세상을 바꾼 두 사건이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공생애가 어떻게 시작되는지부터 보아야 합니다. 역사상 세상을 뒤바꾸어 놓기 위해 예수님을 준비시킨 두 사건이 연달아 발생합니다. 바로 세례 받으신 일과 곧이어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받으신 일입니다. 마태복음 3장과 4장에 이 둘이 나란히 제시되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마태복음을 봅시다. 3:13-4:11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예수님의 생애에서 사복음서에 모두 언급된 사건은 십자가의 죽음을 제외하고는 세례뿐입니다. 매우 중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시험 장면이 기록된 곳은 마태과 누가복음입니다.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할 점은 세례와 시험이 마 4:1"그때에"라는 한 단어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 3:17"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철석같은 확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때에 예수께서는 성령께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을 받기 위해 사막으로 가셨습니다. 큰 복과 성공 뒤에 시련과 유혹이 찾아왔습니다. 아무리 애쓰고 노력하고 여건이 순탄해도 결국 무언가 끼어들어 삶을 망쳐 놓습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내 몫을 더 잘해서 착하게 살고 하나님께 순종하면 되지 않는가? 모든 고난과 역경에서 보호해 달라고 매일 기도하면 되지 않는가?" 여기 실제로 그런 삶을 사신 분이 계십니다.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의 삶이 하나님을 온전히 기쁘시게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령 하나님도 예수님 위에 임하여 그분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과 능력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은 마귀의 손아귀 속으로 이끌리셨습니다. 요컨대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뒤이어 악의 유혹과 광야와 처참한 굶주림과 목마름이 따라옵니다. '그때에'라는 한마디가 대단한 단어입니다. 마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려는 것 같습니다. "잘 들으라. 시련과 환난을 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이는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이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다. 우리를 성숙하게 빚으시려는 하나님의 신비롭고 선한 계획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 사탄의 시험 장면은 개막전인 시작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그분은 거부, 살해 시도, 배반, 빈곤, 비애, 상실을 끝없이 당하다가 결국 고문을 거쳐 목숨을 잃을 것입니다. 억울한 재판과 사법 살인을 당하십니다. 이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위력과 복잡성과 잔인성을 보여 줍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이 철저히 순전히 물리적 힘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는 영이나 혼도 없고 귀신이나 천사도 없습니다. 매사가 자연과학으로 다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지난 세기 동안 사상가들은 인간의 마음속과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깊이와 위력에 번번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경험하고 전체 역사에서 목격하는 모든 일들은 성경으로 설명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악은 과학의 단견보다 다차원적이고 복잡 미묘합니다. 제도적 불의와 개인적 무지와 생리적 불균형 외에도 세상에는 악한 영적 세력들이 정말 존재하며, 그 모두의 배후에 하나의 초자연적 인격체 즉 사탄이 존재합니다. 서구 세계는 성경이 말하는 악의 이런 차원을 다분히 배격해 왔거니와 그 결과로 우리도 욥의 친구들처럼 삶 속에 있는 악의 위력을 늘 과소평가하고 때로는 잘못 진단합니다. 착하게 살면 삶이 형통한다는 신념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는 면에서도 단순한 논리입니다. 그분은 무한히 지혜로우셔서 처음부터 끝을 내다보시며 우리를 향한 선한 목적을 광야 저편에 숨겨 두셨습니다. '고난을 인내로 견딘 욥은 지금까지도 수없이 많은 사람을 돕는 귀감이 되었고, 예수님도 이 시험에 통과하여 마침내 역사를 바꾸어 놓고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좀처럼 고치기 힘든 세상의 악 앞에서 현대인이 매번 충격에 빠지는 이유는 성경을 '원시적'이라 치부하여 그 안에 기록된 실재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악의 정체 즉 사탄을 더 잘 이해한다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3. 전환: 악에 맞서기 위한 세 가지 물음

본문에 따르면 진짜 악에 맞서려면 세 가지 물음에 답해야 합니다. 적은 누구인가요? 전선은 어디인가요? 이 싸움에서 우리가 가진 최상의 방어는 무엇인가요? 첫째, 적은 누구인가요? 앞서 말했듯이 성경적 관점의 악은 복잡하고 광범위합니다. 역사적으로 성경적 관점에 맞서 악의 본질을 설명하려 한 라이벌은 주로 두 가지입니다. 한쪽 극단에는 '이원론'(dualism)이 있습니다. 세상에 선과 악이라는 대등하고도 상반되는 세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실재는 근본적으로 이 두 세력의 충돌에 의존해 있으며 종말까지나 어쩌면 영원토록 싸움이 계속됩니다. 이 관점대로라면 하나님은 정말 사탄보다 조금도 더 강하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도성에서 지적했듯이 세상 종교 사상은 이원론적입니다. 대다수 종류의 세상 종교는 선한 신들과 악한 신들, 선한 세력과 악한 세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질서와 아름다움과 희망의 터전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구제 불능인 폭력의 장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싸움을 종결짓고 영원한 평화를 이룰 가망은 전무합니다. 악에 접근하는 다른 하나의 철학은 '범신론'(pantheism)입니다. 이 관점은 반대쪽 극단에서 모든 실재가 하나라고 주장합니다. 만물이 신의 일부이고 신 또한 만물이므로 결국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하나라는 것입니다. 악과 고난은 이원론에서처럼 영원한 난공불락이 아니라 아예 존재하지도 않으며, 따라서 환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현대 세속 문화는 양쪽 관점을 조금씩 차용하여 악을 일관성 없는 단편적인 것으로 간주합니다. 세속주의는 고대 다신교와 비슷하여 세상을 하나의 전능하신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니라, 통제 불능인 폭력적 세력들의 산물로 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인간도 진화와 적자생존의 산물입니다. 이런 세계관이 옳다면 폭력을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인간은 무의미한 폭력적 수단을 통해 지금까지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똑같은 방식으로 존재하고 진화할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많은 세속 사상가는 인간의 악을 나쁜 사회 제도나 망가진 심리 상태의 산물로 봅니다. 19세기부터 그들이 내놓은 이론에 따르면 연쇄 살인범은 잘못된 양육이나 빈곤이나 기타 박탈의 산물입니다. 인간은 본래 악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남을 살해하기까지는 무언가 나쁜 일을 겪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좀 더 근대에 이르면 세속 사상은 상대주의적이 됩니다. 특정한 문화적 관점에서 악처럼 보이는 일도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입장에 따라 테러리스트가 자유의 투사일 수도 있습니다. 현대 세상은 이런 상대주의의 노리개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관점은 이원론도 아니고 범신론도 아닙니다. 성경이 내놓는 설명이 바로 실존하는 마귀 즉 사탄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세상에는 악이 존재하며, 그 악의 일부는 실존하는 사탄의 세력 탓입니다. 당신은 마귀라는 개념을 순진한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원시적인 신념으로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마귀의 존재 없이 세상을 설명하려 한다면 당신이야말로 영적, 지적으로 순진하고 고지식한 사람입니다. 둘째, 전선(The front)은 어디인가요? 본문에 보면 마귀는 거듭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말합니다. 그게 그의 주된 공격이며 예수님께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방금막 예수님께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확언하셨는데도 사탄은 즉각 그 부분을 치고 들어옵니다. 예수님께 말하기를 하나님이 그분을 사랑하시고 능력을 주신다는 증거를 받아내라고 부추긴 셈입니다. 사탄의 주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전폭적 수용과 무조건적 아버지 사랑에 대한 확신을 잃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그 주요 전선에서 사탄은 우리를 어떻게 공격해 올까요?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고난 받으시고 죽으셨을까요?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선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이루어 주신 일을 의지하면 우리는 은혜로 하나님의 가정에 입양됩니다. 1:12”영접하는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임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확신이야말로 가장 깊고 생명력 있는 기쁨의 근원입니다. 한편으로 이제 우리는 아버지가 기뻐하지 않으시는 모든 죄에서 돌이키고 싶어 집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행하기 때문에 효과도 새롭습니다. 또 한편으로 우리를 괴롭히던 두려움과 염려와 정서적 불안감이 점차 사라집니다. 노력의 성패 때문에 우쭐하거나 절망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외모나 지위로 인해 불행에 끌려 다니지 않으며, 이전처럼 남의 비판에 위축되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자아상은 잃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합니다. 사탄이 왜 이것을 공격의 주요 전선으로 삼는지 알겠습니까?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람들을 막아 이런 확신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합니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참 정체를 계속 보지 못하게 막습니다. 그분을 특별히 좋은 사람으로만 믿게 합니다. 기독교를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구원이 그리스도를 통한 값없는 선물임을 모르는 경우에는 사탄이 계속 그들을 복음 자체에 무지한 상태로 둡니다. 구원은 우리의 도덕적 노력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됩니다. 사탄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세우는 것을 헷갈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신이 사랑받는 자녀로 입양되었음을 원칙적으로 아는 경우에는 사탄이 우리를 도덕적 행위와 선과 노력에 기초한 자아상으로 되돌아가게 하려 합니다. 사탄이 질색하는 한 가지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의 삶과 마음에 확신으로 자리 잡는 것입니다. 19세기말 영국 성공회 주교였던 J. C. 라일(J. C. Ryle)'확신'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확신은 하나님의 자녀를 해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확신에 힙입이 구원을 확신했고, 큰 죄의 빚이 탕감받았으며,, 중병이 치유되었고, 큰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느낍니다. 확신 덕분에 그는 환난 중에 인내하고, 슬픔에 요동하지 않고, 확신은 쓴 잔을 달게 하고, 십자가의 짐을 덜어 주고, 험지를 수월하게 다니게 하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빛을 비추어 줍니다. 확신은 길동무요 마침내 확실한 집입니다. “.“ 셋째, 이 싸움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상의 방어는 무엇입니까? 대체로 사탄은 우리 마음속에 거짓을 심어 공격합니다. 사탄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에덴동산의 기사가 좋은 예일 것입니다. 사탄이 아담과 하와의 마음속에 제시한 거짓된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났고 그분의 성품을 공격했고 그분과의 신뢰 관계를 망가뜨렸습니다. 우리에게도 다를 바 없습니다. 사탄은 우리에게도 같은 방법을 사용합니다. 최상의 방어는 주문을 외우는 것이 아닌 진리를 되새기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성경을 활용하시는 방식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은 마귀에게 공격당하실 때 성경을 활용하셨습니다. 당신이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께 머리로 동의하는 것까지는 사탄도 개의치 않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무엇을 해야만 합당하고 사랑스럽고 소중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당신으로 하여금 믿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교묘히 또는 대놓고 부인하는 사단의 모든 말에 예수님은 신 8:3, 6:16, 6:13절을 차례로 인용하여 대응하십니다. 심지어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던 가장 깊은 고뇌의 순간에도 그분은 시 22:1절을 인용하셨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고통이나 충격의 순간에 머릿속에서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야말로 존재의 진짜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그 순간에도 성경을 붙잡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 안에 깊이 박혀 있으면 사탄이 틈타 당신의 구원 확신을 방해하기가 어렵습니다.

 

4. 대단원: 싸움을 통과할 방법이 있다

사탄의 공격을 만날 때 성경 말씀을 우리의 마음 중심에 두고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 3:16"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해야 한다.” J. C. 라일은 이렇게 썼습니다. 참된 기독교는 싸움입니다. 세상에는 참된 기독교 신앙이 아닌 많은 것들이 종교(형통 신앙, 기복 신앙)라는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신앙에는 어떤 '싸움'도 없습니다. 그들은 영적 분투, 노력, 갈등, 자기부인, 깨어 있음, 긴장 같은 것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시험과 세례를 부디 따로 떼어 놓지 마십시오.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온 것은 그분이 하나님께 사명을 위임받고 능력을 입으셨기 때문입니다. 곧 그분은 본격적으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치유하고 영적 굴레에서 해방시키시는 구원 사역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도록 돕거나 혹은 긍휼과 섬김의 행위로 가난한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는 그 지점에서 사탄과 싸우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전투하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에 따르면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의 수많은 부분이 잘못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영적 전쟁을 위한 자원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본문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십니다. 히히 4: 14절에 보면 예수님은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십니다. 제사장들이 조언자이며 치유자였듯이 예수님도 능히 16"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며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푸신다.“ 왜 그럴까요? 그분은 15"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기 때문입니다.그분은 인간으로서 모든 것을 겪어 보셨기에 곁에서 우리를 도와 안팎의 악의 현실에 직면하여 싸우도록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속에서 사탄의 거짓말과 싸우고 세상에서 사탄의 활동과 싸울 때 우리는 주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주님께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완벽한 성경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치열한 불 같은 시험을 통과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과 내 안에 계신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되었으니, 이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의지하여 사탄아 물러가라 명령함으로써,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