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에 대한 이론/그리스도 중심적인 네러티브 설교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wordlove 2024. 5. 19. 15:07

1. 본문: 11:23-36

2. 명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이다. (언적 명제)

3. 제목: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1. 갈등: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지난주의 말씀을 요약하면서 시작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통해 구원하실 사람들을 택하십니다. 하나님과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책임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자신들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완전히 포기하셨는가? 아닙니다! 바울은 곧바로 그렇지 않다고 힘주어 대답하며 로마서 11장에서 그 이유를 상세히 밝혀 줍니다. 요컨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모든 이스라엘이 믿지 않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은 롬 11장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논증을 제시합니다. 1절에서 바울의 논증은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나를 보라! 나도 예전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던 완악한 사람이었다. 나 같은 사람도 포기하지 않으셨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버리셨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나를 택하셔서 당신의 구원 사역을 힘차게 이루도록 하셨다." 바울 자신의 이야기와 엘리야의 예를 들어 하나님이 전적인 은혜로 신실한 남은 자를 택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의를 얻지 못한 이유는 7" 이스라엘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9:6"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다시 말해 이스라엘 민족 전체나 대다수가 아니라, 바울과 같이 소수의 믿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의를 얻은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비록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의를 진지하게 구했지만, 대다수가 행위를 통해 의를 구하려 했습니다. 반면 택하심을 입은 소수만이 그리스도의 의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는 모습입니다. 은혜에 대해서는 필사적으로 거부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섬기는 데는 죽을힘을 다하다니 실로 기가 막힐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은 거룩하고 위대하신 분이라 어떠한 악도 용납하지 않는다고 단정하곤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기로 결심합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구원을 거저 얻는다는 생각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사실 유대인과 이방인이 복음을 받아들인 방식은 이방인뿐 아니라 유대인도 믿게 되는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의 일부분이었습니다. 11-12절에서 첫 번째 단계로 이스라엘은 넘어졌지만, 그로 인해 이방인들에게 구원이 주어졌습니다. 흥미진진하게도 적지않은 유대인들이 믿었지만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적대적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12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 “이“ 된 것입니다. 11절에서 두 번째 단계로 이방인들은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만들었다.바울은 사역의 목표 가운데 하나가 자신의 골육을 14시기 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했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대부분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이제 유대인들이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많은 약속들이 이방인들에게 실현되는 것을 보고서 시기심의 발동으로 유대인들도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것입니다.

 

2. 갈등 심화: 접붙여진 가지

16절에서 바울은 당시 유대인 신자들을 앞으로 생겨날 수많은 믿음의 가지를 약속하는 뿌리에 비유합니다. 이어 17절에서는 올리브나무의 비유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경우에 더 이상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감람나무에다 돌 감람나무의 어린 가지를 접붙여서 되살리는 것이 관례입니다. 감람나무 뿌리에서 올라온 수액은 돌 감람나무의 가지를 고귀하게 만들고, 이제 감람나무는 다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런 원예학적인 설명은 바울의 대표적인 은유입니다. 돌 감람나무 가지는 활발하게 성장하지만, 자양분을 얻을 수 있는 나무에 접붙여질 때만 생명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동시에 접붙여진 가지는 온 나무를 새롭게 하여 다시 생명이 순환하도록 합니다. 바울은 이 은유를 특별히 이방인들에게 적용합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접붙여진 돌 감람나무의 가지들이다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이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생명의 복음을 의미하는데, 이스라엘의 선조인 아브라함 이래로 소수의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믿지 않는 유대인들, 18절에서 곧 '꺾인 가지들'을 절대로 멸시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이 지녔던 성경의 진리로부터 혜택을 받았음을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무에 접붙여졌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짐으로써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을 물려받았습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한 것은 다만 성경의 역사와 이스라엘을 통해 얻은 약속들 가운데 들어왔다는 것뿐입니다. 18"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이 때문에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유대인을 업신여기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쓰는 성경도 그들에게서 왔고, 예수 님도 유대인이셨습니다. 20절에서 바울은 이방인 신자들에게 교만하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고 말합니다. 19"(유대인)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이방인) 접붙일 받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처럼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도 기회가 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유대인들보다 자신들이 더 합당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21"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신 즉"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도 아끼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겸손하게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22절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자하게 대하실지 아니면 준엄하게 대하실지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지, 믿지 않는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3. 전환: 온 이스라엘이 구원받으리라

이제, 바울의 논의는 이스라엘의 미래로 돌아옵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23" 그들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본성을 거슬러" 구원하 수 있었다면, "원 가지인" 유대인들은 24"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라" 바울은 이렇게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94-5절에 "나오는 어떠한 특권도 없이 태어난 너희들도 하나님이 구원하셨는데, 그 모든 특권을 갖고 태어난 유대인들이야 얼마나 확실하게 구원하시겠는가!"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 신자들이 우쭐대지 않도록 한 가지 25절에서 "신비"를 밝힙니다. 이스라엘이 끝까지 완악한 마음을 품지는 않을 것이며 결국 26"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사실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선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25"이스라엘"은 누구를 의미할까요? 이스라엘에서 택하심을 받은 남은 자만을 지칭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이것은 무의미한 말이 되고 맙니다.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은 당연히 구원받을 것입니다. 더욱이 25절에 나오는 "이스라엘"은 이방인과 대조적으로 사용된 단어라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받으리라"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26~27절의 이사야와 예레미야에 나오는 인용구는 그들의 죄를 없이 할" 시온에서 오는 구원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 님입니다. 요컨대 바울은 때가 되면 온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경험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지속해서 복음을 전할 것을 가장 강한 어조로 독려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한 존 스토트의 이야기는 눈여겨볼 만합니다. "나치로부터 대학살을 경험한 유대인들이 자신들에게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한 것은 이해할 만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계속해서 유대인들에게 복음 전도를 해야 할 것인지 난처한 처지에 처했습니다. 더욱이 유대인을 대상으로 하는 복음 전도가 반유대주의의 용납될 수 없는 또 다른 모습은 아닌지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두 언약론'이라는 것을 들고 나왔습니다. 곧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한 가지 길과 하나님과의 언약에 의존하는 역사적 이스라엘을 위한 또 다른 길이라는 두 가지 다른 구원의 '경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을 가진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속하는 하나의 감람나무밖에 없다는 로마서 11장의 입장은 '두 언약론'과 명백히 배치됩니다. 불신앙 가운데 고집을 부리지 않는다면 유대인들도 다시 접붙여질 것입니다." 바울은 26절에서 어떤 의미로 "" 이스라엘이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스토트는 이스라엘이 어떤 예외도 없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온 이스라엘"은 유대교 문헌에 반복해서 나오는 표현인데, '어떤 예외도 없는 모든 유대인'이라기보다는 전체로서의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온 이스라엘은 큰 유대인 집단을 의미합니다. 11장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은 믿음을 가진 소수의 유대인과 대조해서 대다수 이스라엘을 지칭할 때 종종 이 말을 사용했습니다. 많은 사람은 바울의 말이 마지막 순간 대규모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의미하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수많은 유대인이 믿게 될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유대인의 수가 점진적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방인 신자들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28절 그들이 보이는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들"에게 한 약속과 29"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으므로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은 계속 이어집니다. 바울은 희망을 놓지 말고 유대인들을 지켜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다음과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30원래 나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던 사람이었고 복음을 거부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복음이 이스라엘의 불신앙 너머에까지 전해져 지금 여기 그리스도인으로 서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통해 은혜로 나에게 오셨다면. 나의 믿음을 통해 은혜로 이스라엘에게도 가실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32절은 11장뿐 아니라, 91절부터 시작된 단락에 대한 결론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32절을 30-31절과 더불어 하나님이 편애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 오시기 위해 유대인들을 사용하시고, 유대인들에게 오시기 위해 이방인들을 사용하십니다.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 불순종했지만,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 찾아질 것입니다.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것은 F.F. 브루스의 표현대로 모두에게 예외 없이라기보다는 모두에게 차별 없이 임한다는 의미입니다.

 

4. 대단원: 누가 하나님의 판단을 헤아리랴!

이어지는 33-36절에서는 바울의 즉흥적인 찬양이 갑자기 터져 나옵니다. 이것은 정독하며 묵상해야 할 고귀한 찬양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도 자신의 찬양에 대해 몇 가지를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성경의 진리가 빠진 채 찬양해서는 안 됩니다. 찬양이 터져 나올 때 바울은 성경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34절에서는 이사야 4013절을, 35절에서는 욥기 4111절을 인용합니다. 참된 찬양은 일반적인 묵상이 아니라, 특별히 성경을 묵상할 때 가능합니다. 혼자서 혹은 여럿이 함께 찬양하고 예배드릴 때, 그 중심은 항상 성경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찬양이 빠진 채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거나 연구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성경의 진리를 단순한 지식이나 삶에 적용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통로로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 성경의 진리를 사용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갈 때 초연하고 냉철한 방법으로 연구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자신이 진리에 의해 감동하고 위로받고 도전받아야 합니다. 진리의 힘을 느낄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항상 열어 놓아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르침들은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을 줍니다. 바울은 인간의 성취를 보면서 찬양하고 싶은 열망을 품지는 않았습니다. 찬양은 우리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무능하며,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존재인지 아는 데서 나옵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완전한 주권에 속한다는 진리 안에 기쁨과 찬양이 있습니다. 넷째. 찬양하기 위해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도 하나님의 길을 분별하거나 헤아리지 못한다고 힘들어하지 않았습니다.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관해 다 이해하지 못하면 찬양할 수 없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도를 다 이해하고, 그 길을 다 분별하고, 그 성품을 논리적으로 다 설명할 수 있다면 그분은 상당히 '유한한 하나님'일 것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보다 훨씬 더 높고 광대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그분의 뜻과 계획을 모두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든 것 때문에 그분을 찬양합니다. 또한, 보여주시지 않은 더 많은 것들 때문에 그분을 찬양합니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드릴 수 있습니다. 36" 그에 영광이 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불순종하며 살았던 우리를 이스라엘 통해 예수 님을 알고 믿게 하신 하나님, 이제 불순종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온 세상 백성들을 우리를 통해 구원하시기를 계획하시고 도구로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 영광 찬송 존귀를 드립시다. 또한, 주님의 재림 징조 가운데 가장 주의해서 살펴야 할 성경적 증거는,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돌아오는 수가 증가하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 교회의 마지막 선교의 대상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임을 알고, 힘써 이스라엘 선교에 집중해야 함을 성경이 명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