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요 14: 16-27
2. 명제: 두 분의 대언자를 의지하여 승리할 수 있습니다. (가능성의 명제)
3. 제목: 두 분의 대언자
1. 갈등: 교양있고 괜찮은 사람인 나에게 굳이 대언자가 필요한가?
지난 3년 동안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대면하며 생활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고 배우고 대화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분이 요 13:33"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제자들은 두려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 자기도 목숨을 버리기까지 따라가겠다고 공언합니다. 모든 제자들의 반응은 전부 영적으로 무지하기 짝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전혀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요 13:38"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라고 되물어십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자신이 사람들의 죄를 위해 죽으실 것을 거듭 가르치셨는데도 그들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너희는 정말 나를 모르는구나. 나를 인격적으로 깊이 만나야 하는데 정말 그러지 못했구나"라는 말씀이 나왔습니다. 사도들은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고 예수님의 마음과 목적은 더 몰랐습니다. 다음날이면 그분은 죽으실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 이후로 그들에게 많은 박해와 훼방이 닥칠 것을 아셨습니다. 이런 그들이 예수님을 이해하고 그분의 증인이 될 수 있을까요? 요 14:16-27“14:16-2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 회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께서는 몇 가지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떠나신 후에 즉 죽으신 후에, 아버지와 아들께서 성령을 대신 보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요 16:7”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한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바로 오실 성령을 통해 제자들은 앞으로도 예수님을 볼 수 있으나, 그분이 몸으로 계시지 않기에 세상은 그분을 볼 수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은 가시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께서 보내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변함없이 임재하신다는 약속입니다.
2. 갈등 심화: 성령의 여러 이름
그렇다면 이 인격적 존재인 성령은 누구입니까? 물론 삼위 가운데 한분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요 14:16절"또 다른 보혜사라고 부르십니다.” KJV의 '위로자'(Comforter)를 비롯하여 '조력자'(Helper)나 '상담자'(Counselor)로 옮긴 역본도 있습니다. NIV에서 '대언자'(Advocate)라는 단어가 쓰였는데 ’대언자'’ 대언자'는 법률 용어로써 때로 법정에서 남을 대변하는 변호사를 가리킵니다. 그 원어는 '파라클레테'(paraklete)라는 명사인데, '파라'(para)는 곁에 온다는 뜻입니다. 즉 도와주기 위해 곁에 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법률 상담자' 즉 변호사로 생각하면 의미가 더 잘 살아납니다. 변호사는 당신에게 말할 뿐 아니라 관련 판사를 상대로 당신을 대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 혹은 대언자로 칭하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면 첫 대언자는 누구입니까? 요한일서 2장 1-2절에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 파라클레데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즉 예수님이 첫 대언자이시고 성령이 두 번째인 대언자란 말입니다. 대언자나 상담자라는 단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만 아니라, 성령님이 우리 마음속에서 행하시는 일을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 3년이나 예수님과 함께하고 배운 제자들은 여전히 그분의 일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분을 깊이 알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이 문제의 해법이 바로 성령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는 용서받을 수 있었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분은 다락방에서 자신을 우리의 대언자라 칭하심으로써, 자신의 죽음이 그보다 더 근본적인 행위임을 보이셨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2장에 지적했듯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눈이 어디선가 우리를 주시하고 있음을 마음 깊이 압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정의는 믿지 않아, 옳고 그름은 사람과 문화마다 상대적이기 때문이지." 하지만 문화나 가족이나 감정이 괜찮다고 해도 자신에게 잘못이 존재함을 인간은 본능적으로 압니다. 어딘가에 우리를 심판할 정의의 법정이 존재함을 우리는 압니다. 성경이 그렇게 가르칩니다. 히 9:27”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만일 성경이 틀려서 하나님도 없고 정의의 법정도 없이 폭력과 불의가 당연한 것이라면 이 세상에는 무슨 희망이 있을 수 있을까요? 반대로 정의의 법정이 존재한다면 당신과 내게 무슨 희망이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은 고사하고 자신의 도덕 기준에 조차 부합하게 살지 못합니다. 양심이란 무엇입니까? 로마서 2장의 바울에 따르면 양심은 하나님의 심판 자리에서 보내오는 전파를 수신하는 라디오와 같습니다. 예수님이 대언자라는 성경 말씀 속에는 정의의 기준이 존재하고 우리가 그 앞에 서서 심판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대언자에 함축된 첫 번째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대언자가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당신이 범죄로 기소되어 법정에 설 때 변호사는 어떤 역할을 합니까? 신학자 찰스 하지 (Charles Hodge)의 말에 의하면 법정에서 당신은 대언자 뒤로 숨습니다. 당신이 말을 더듬어도 변호사가 유창하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당신도 유창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무지해도 변호사가 해박하면 당신은 법정에서 어떻게 보일까요? 해박해 보입니다. 경우에 따라 당신은 발언하지 않거나 아예 법정에 출두하지 않아도 됩니다. 변호사가 대리인이 되어 당신을 대신해 출두할 것입니다. 당신의 재판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대언자가 얻어내는 결과대로 됩니다. 변호사가 승소하면 당신도 승소하고 변호사가 패소하면 당신도 패소합니다. 요컨대 당신은 대언자와 연합하여 대언자 안에 존재합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좋은 변호사가 아니라, 당신 대신 하늘 아버지 앞에 출두하실 완전한 대언자이십니다. 법정에 기소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유창하고 똑똑한 대언자가 아니라, 설득력 있는 대언자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어떻게 우리를 변호하십니까? 이어지는 요일 2:2절에서 요한은 우선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위해 자비를 구하시는 게 아닙니다. 요일 1: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라 했습니다. 보다시피 그리스도인이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이 자비롭게 다시 기회를 주려고 용서하신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시면 그분은 의롭지 못하십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식으로 대언하십니다. "아버지여, 내 백성이 죄를 범하였으니 법대로 죄의 삯은 사망이오나 내가 그 죗값을 치렀나이다. 여기 죽음의 흔적인 내피를 보소서. 십자가에서 내가 죄의 형벌을 다 당했사오니 같은 죄를 두 번 벌하심은 의롭지 못하옵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위하여 자비를 구하는 게 아니라 정의를 구하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인이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의 의로우심 덕분에 용서받을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세상의 다른 모든 종교와 철학은 기본적으로 삶을 정의의 저울로 봅니다. 눈가리개를 쓰고 저울을 든 여신상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 은유에서 저울의 한쪽에는 당신이 있고 반대쪽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첫자리에 모시고, 두 번째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고 ""라고 말합니다. 이런 율법이 잔뜩 쌓여 저울을 반대쪽으로 기울어지게 합니다. 당신은 평생 저울에 선행과 공로와 절제된 삶을 필사적으로 쌓아 올려 하나님의 법의 무게를 상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법은 당신을 대적하게 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착하게 살지 않으면 율법 쪽이 더 무거워져 파멸을 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이 늘 유죄 쪽을 가리키므로 당신이 이를 상쇄하거나 모자라는 것을 보태야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이 당신의 대언자시면 이제 하나님의 법이 완전히 당신 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진심으로 "아버지여, 예수께서 이루신 일로 말미암아 저를 받아 주소서"라고 기도하면, 그분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이 당신의 계좌에 전가됩니다. 이제 당신은 하나님의 법에 따라 무죄 선고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을 우리의 대언자이자 "곧 의로우신 분“이라 칭합니다. 이 말은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이 당신을 보실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신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고후 5: 21절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썼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죄가 없으신데도 죄인으로 간주되어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으셨듯이 우리도 의롭거나 온전하지 못하지만 그분을 믿으면 아버지께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의롭고 험없고 온전하게 여겨 주신다는 뜻입니다. 첫 대언자의 직무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내가 이룬 일을 보시고 이제 그들을 내 안에서 받아 주소서"라고 대변하십니다.
3. 전환: 설득력 있는 대언자가 필요하다
그러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또 다른 대언자 곧 성령의 직무는 무엇입니까? 첫 대언자는 성부 하나님께 당신을 대변하시지만 두 번째 대언자는 당신에게 말씀하십니다. 요 14:26절에서 성령의 직무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셨으나 사도들이 미처 깨닫지 못했던 모든 일을 너희에게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심으로써 구원 사역에 대한 그분의 모든 가르침을 사도들에게 깨우쳐 주십니다. 신학자 패커(J. L. Packer)는 성령의 사역을 투광 조명등과 매우 비슷하다고 가르쳤습니다. 밤중에 투광 조명을 받는 건물 옆을 지나가면서 우리는 "저 건물 참 멋있다"라고 말합니다. 조명등의 직무는 자신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건물의 모든 특성을 부각해 건축미를 드러내는 것에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의 전날 밤 다락방에서까지도 사도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며, 그 사랑 때문에 십자가를 지실 것이며, 그 사랑으로 이루실 일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아직도 그분을 제대로 몰랐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실 것입니다. 요 16:9절에서 성령은 그들의 손만 잡아 주거나 힘만 주시는 게 아니라 깊은 진리를 가르쳐 삶을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마침내 자신들의 뿌리 깊은 죄를 보게 하시고, 궁극적으로는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일을 깨우쳐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지만 우리에게 정보를 가르치시기만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쳐 주십니다. 요 16:8-11절에서 우리를 책망하시고 도전하십니다. "너는 죄인이니 죄인답게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고 있느냐? 성령은 그리스도가 사랑으로 이루신 일과 그 결과에 합당하게 살도록 우리를 설득하고 훈계하고 권고하고 간청하십니다.” 제자들은 마침내 예수를 보고 그 사랑의 임재를 알게 될 것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몸으로 떠나시고 성령으로 다시 오시기 전까지는 그분을 잘 알지 못했고, 알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에는 성령이 지금처럼 충만하게 세상에 부어지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만 예수님을 온전히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높고 길고 넓고 깊은지를 십자가를 통해 보여 주십니다. 다시 말해서 20002000년 전 다락방에 있던 사도들보다, 지금 여기서 성령의 힘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그분의 임재와 사랑을 더 잘 알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4. 대단원: 은혜의 방편, 성령의 역사하심
성령 안에서 당신에게 얼마나 엄청난 게 주어졌는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의무는 성령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의 음성에 귀를 더 기울일 수 있을까요? '은혜의 방편'을' 통해 즉 혼자 혹은 공동체로 말씀을 읽고 공부하기, 기도하기, 예배, 세례와 성만찬의 성례 등에 힘쓰며, 또는 환경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런 은혜의 방편들을 잘 사용하면 나머지는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은혜의 방편을 게을리하면 두 번째 대언자가 역사할 여지가 없습니다. 두번째 대언자의 역사하심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당신에게 무한한 손해입니다. 예수님은 27절에서"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이는 예수님이나 그분의 평안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평안은 한결같지만 세상의 평안은 환경에 따라 쉽게 바뀝니다. 남들이 당신을 좋아하고 돈이 많고 직장에서 성과가 좋고 관계가 원만하는 등 삶의 여건이 순탄하면 평안하게 느낍니다. 그러나 주식이 떨어지고 일에 실패하면 우울하고 불안해집니다. 왜 그럴까요? 당신의 평안이 환경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성령이 주시는 진짜 평안을 누리십시오. 18세기 영국의 웨일스의 어느 설교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십시오. 청소년 시절 그는 가족들과 함께 숙모의 임종을 지켜보았습니다. 숙모는 신앙이 좋은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다들 그녀가 의식을 잃은 줄로 알고 몇몇이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박복하기도 하지. 고달픈 인생에 남편을 둘이나 사별하고 병치레도 잦더니만 죽을 때까지 이렇게 가난하니. 그 순간 갑자기 그녀가 눈을 뜨고 빙 둘러보며 말했습니다. "누가 나더러 가난하대요? 나는 큰 부자예요!! 잠시 후면 사자처럼 담대히 그분 앞에 설 겁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평안이 있었습니다. 대언자의 말씀에 늘 귀를 기울인 결과였습니다. 아마도 그녀의 말은 이런 뜻이리라 생각됩니다. "죽을 수 없는 유일한 남편이 내게 있고 영영 사라지지 않을 영생도 내게 있다. 나를 정말로 죽일 수 있는 유일한 병은 죄인데 내 구주께서 오래전에 그것도 해결하셨다. 그러니 내가 어째서 가난하단 말인가?" 두 번째 대언자인 성령이 그녀에게 첫 대언자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무서운 죽음 앞에서도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을 믿으면 심판대 앞에도 사자처럼 담대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늘 예수님을 실망시켰으나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세상을 변화시킬 구명 밧줄이 오셨으니, 두 번째 대언자이신 성령님이십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으라. 내가 떠난 후에는 성령을 받아들이라. 성령이 말씀하실 진리를 들으라. 그러면 성령이 너희에게 누구도 줄 수 없는 진짜 평안을 주시리라." 두 번째 대언자이신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우리는 예수님을 알 수도 없고, 그분의 말씀을 깨달을 수도 없으며, 그분의 증인 될 능력도 없으며, 평안도 없습니다. 우리는 변화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성령의 충만을 사모하고, 기도하시기를 힘쓰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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